with 존.라일 사복음서 강해
[마 1:1-17] 그리스도의 족보 (눅 3:23-38)
유대인에게 '예언(구약의) 성취'를 드러내는 이 책의 목적은 시작부터 나타난다. 메시야는 아브라함(창 12:3)과 다윗의 자손(사 9:7)으로 나올 것을 예언하는데, 시작에서 예수님이 그 자손임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12:3)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9:7)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기에 기쁘고 감사하다. 하나님을 믿는자, 영접하는 자는 의롭다 여김을 받고, 영생을 받는다는 약속이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과거의 약속을 결코 잊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다. 얼마나 미천한 우리인가! 그런 우리를 속량하기 위해 우리의 자손이 되기까지 낮아지셨기 때문이다.
다음 족보가 나오는데 누가복음의 족보와는 몇가지 차이를 보인다.
먼저 그리스도를 왕으로 표현한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왕통을 제시하나(언약의 성취를 강조),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를 표현한 누가는 첫사람 아담에게까지 소급하였다.(인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강조)
또한 다윗부터 요셉까지는 족보에 등장한 인원수,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어떤이들은 마태는 요셉의 조상들을 기록하였고, 누가는 마리아의 조상들을 기록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본서에는 요셉(예수의 아버지)의 윗대가 야곱이나(1:16), 누가복음에는 헬리로(눅3:23)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야곱은 요셉의 아버지이고, 헬리는 마리아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여하튼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표현한 본서는 '다윗 왕가'의 계통을 이어 태어나신 사실을 먼저 밝히고자 한다(1절).
이 족보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1)아브라함, 야곱, 유다, 다윗, 나단, 레사 등 모두 첫째가 아니었다. 대체로 동생의 계보를 이었는데 낮은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되었다.
(2)야곱의 아들들 가운데서 '유다와 그의 형제'에 대해 언급하나 '이스마엘', '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교회에서 내어쫓김을 당했기 때문이다.
(3)4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가나안 태생의 기생 라함, 모압 여인 룻, 간음한 여인 다말과 밧세바가 등장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은 없으며(이는 구약에서도 그랬음을 증명한다.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회개하는 자(죄인)를 용서하신다. 특별히 눈길이 가는 것은 밧세바를 표현할 때,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7절)'라고 표현을 한 것이다. 이 장면을 통해 다윗의 죄를 더욱 부각한다.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그 계통을 통해 오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이 더욱 실감이 난다. 그뿐아니라 나는 다윗 앞에서 거룩하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솟는다. 예수님은 나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이를 위해 친히 예수께서 죄있는 육신의 모양(롬8:3)을 취하셨다.
(4)다윗 외의 왕들은 '왕'이라 불리지 않은 것은 왕권의 언약이 그와 더불어 맺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시야는 다윗의 위를 계승한다.
(5)선한자와 악한자가 섞여 있다. 은혜는 혈통을 따라 유전되지 않으며 죄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오직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6)11, 12절에 특별히 바벨론 포로시기가 등장하는데, 이 기간동안 유대인들이 멸절되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가 나오시기 위해 특별히 하나님께서 보호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장면들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주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믿는 자들을 남기신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그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참된 그리스도인은 남을 것이다. 주는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7)예수는 요셉으로보나 마리아로 보나 모두 다윗 가문에 속하였다.
(8)이 혈통들이 만나는 중심은 예수님이다.(16절)
특별히 예수님을 언급할 때,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신다고 말한다. 기름부음 받은 자, 온전하 왕이시며 선지자며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에 대해 본서에서 선포할 것임을 다시금 강조하는 시작이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사9:7) 그 정사의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으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마 1:18-25]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명칭 (눅 2:1-7)
신명기에서 보듯 유대인들은 약혼 기간에 성관계를 갖지 않았으나, 간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파혼할 수 없는 사실상의 기혼 관계였고, 그러므로 신 22:23, 24에서 약혼한 사이에 '아내', 남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처녀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
19절에서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 표현한다. 그리고 의로운 사람의 행동을 묘사하는데, 요셉은 약혼녀가 부정한 짓을 했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정죄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은채 끊으려 했다. 물론 그러한 경우 이혼을 할 수 있는 것은 유대인의 규례였다.(신24:1) 또한 신랑으로서 그 상황에 직면했을 때 배신감과 분노는 얼마나 클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으려 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우리는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한편으로 마리아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주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았을 수도 있다. 또한 약혼한 남편에게 버림받을 신세에까지 처한다. 때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큰 짐이 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받는 세상의 괄시와 지탄, 핍박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는 더욱 큰 영광(마리아의 경우 그리스도를 자녀로 삼게되는)을 위한 주의 예비이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 원망하기보다 더욱 큰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아야한다.
20절 이하에서는 주의 사자가 이혼하기로 작정한 요셉의 꿈속에 나타나 마리아가 잉태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니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한다.
여기서 성도의 자세가 나타난다.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나타나 명령할 때, 요셉은 순종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찾아갔을 때 용모가 뛰어난 이새의 아들들을 보고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삼상 16:6)라고 했으나 주께서는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삼상 16:7)'고 말씀하신다. 사무엘은 자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다. 요셉이 그러한 계시를 받았을지라도 믿음이 없었다면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마리아에 대한 의심을 품었을 것이다. 성도는 주의 계시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고집을 내세우기 보다는 주의 뜻을 따라야 한다.
다음으로 예수님에 대해 주의 사자는 계시한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20), 예수라 이름하며(21),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다(21). 그는 육신을 입고 오셨으나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그는 완전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완전한 하나님이기도 하시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와 같으며 헬라어와 어미를 맞추기 위해 고쳐졌을 뿐이다. 구약에서 이 이름을 가진 두 사람(최초의 가나안 정복시의 이스라엘 대장, 바벨론 포로 후 두번째 귀환 때의 대제사장(슥 6:11))이 있다. 그 둘은 그리스도의 탁월한 전형이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여호수아로서 구원의 대장이시며 우리 신앙 고백의 대제사장이시다. 율법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친히 우리에게 주시는 여호수아시다. '예수'라 이름하는 이유는 그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이시기 때문이다. '자기 백성(His people)'이라 말씀하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백성임이 선언된다. 나의 주인이 온 땅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며, 나를 구원해 주신 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신다. 죄를 지은 자는 우리 인간이며 그 원인은 나로부터 기인한다. 나의 잘못으로 내가 죽음에 머물러있는데, 그런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은 너무도 감격스럽다.
22절에서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주께서 하신 약속은 모두 이루어진다. 주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며 그분이 계획하시는 모든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시며, 우리가 승리할 것에 대한 예언은 모두 이루어진 것임을 믿기에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뿐만아니라 이 미천한 인간에 대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격할 따름이다.
23절은 예수께서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밝힌다.(사 7:14) 예수님의 이름은 또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기도 하다. 나를 구원하시며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데, 어찌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잊지는 않았는지 돌아본다. 또한 처너가 잉태한다는 사실을 통해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나타나셨고(창 3:15) 그분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여 승리를 확증하실 것이다.
24절, 25절에서는 요셉을 다시 추적한다. 그는 주의 사자의 분부를 이행하여 아내를 데려오고 아들을 낳았다. 잠에서 깨어 행했다고 하여 지체하지 않고 주의 말씀에 순종했음이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며 그 경외감을 나타낸 것이다.
* 누가복음 2:1-7절에 비해 마태복음은 계시의 성취라는 관점으로 길게 설명한다.
* 오늘날도 예수를 믿는 자가 많지 않다. 당시 유대인들은 외적인 형태를 보고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전혀 믿지 않았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이며, 그분은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하고 강력한 이스라엘 국가를 형성하러 오신 지엽적인 분이 아니라, 온 백성의 죄를 사하러 오셨고 이를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러 오신 예수임을 증거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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