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2015년 4월 18일 토요일

요한복음 18장

[요 18:1-11]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다 (1절). 속죄 제물로서 진영 바깥에서 죽임을 당하시기 위함이다(레4:12,21). 이 장면을, 다윗이 잘 예표하고 있다. 그는 절친인 아히도벨에게 배신당했을 때, 눈물을 흘리며 기드론 시내(1절)을 건넜다 (삼하15:23,30,31). 제자들도 주님을 따라갔다. 그리고 주님이 원수들의 손에 자신을 자발적으로 넘긴 것을 보게 하셨다. 주님은 우리가 원수들에게 저항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온유하게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가르쳐주고자 하셨다.
 겟세마네 동산과 에덴동산은 대조된다. 에덴동산에서는 모든것이 즐거웠으나, 그곳에서 낮에 아담은 죄를 짓고 타락하여 사탄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아담은 숨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밤에 고난 받으셨으나 승리하셨다. 군병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자 그들은 그리스도 앞에 엎드렸다 (6절). 그리고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신 것과 같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을 찾았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병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3절), 예수님께서는 친히 드러내셨다 (5절). 재차 드러내셨다 (7절). 그러나 그들의 제자들은 지나가도록 용납하라고 요청하신다 (8절).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그의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이다.


[요 18:12-27] 안나스 앞에서의 그리스도
"나도 자서전 비슷한 것을 여기에 쓰고 있지만, 과연 나 자신에 대해서 정말 솔직하게 썼을까? 역시 자기 자신의 추한 부분은 건드리지 않고, 많건 적건 간에 자신을 미화해서 쓴 것은 아닐까? 나는 이 <라쇼몽> 부분을 쓰면서 그 점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 p.319.
이 장면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다. 그리고나서야 닭은 울었다 (27절).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때 깨달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예언을 돌이키며 말이다. 위 글을 인용한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부인하면 좋을 때가 종종 있다. 그때 나 자신을 속여, 미화시킬 수도 있다. 그런 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 26:41)"고 말씀하셨다.
반면 본문의 예수님은 베드로와 너무도 다르다. 자신있게 진리를 얘기하며, 감추지 않으며, 떳떳하다.
왜 우리는 기도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항상 서게 된다. 이 본문은 그 질문에 답을 준다. 우리는 예수님과 달리, 동시에 베드로와 같이, 너무도 연약하여 쉽게 하나님을 부인한다. 말로서 할 수도 있지만, 행동으로서 부인할 수도 있다. 그때 연약한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의지해야한다.

2015년 4월 5일 일요일

요한복음 17장

"요한복음 17장은 13장의 속편이다. 각 장에는 우리 대제사장의 사역들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각 장에서 나타나 있는 그의 봉사는 서로 다르다. 하지만 이 두 장은 공히 높은 데에 계시는 우리 대언자를 완전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말하자면 13장에서 우리 대언자께서는 한 손을 그의 성도들의 더러운 발 위에 얹으셨고, 여기에서는 다른 한 손을 아버지의 보좌 위에 얹으시고 놀라우신 솜씨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이어 주는 고리를 만들고 계신다. 13장에서 그는 허리를 동여매시고 우리의 발을 향해 몸을 굽히셨다. 17장에서는 눈을 들어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고 계신다(17:1). 하나님의 깨끗하신 보좌와 우리의 더러운 발 사이에 놓여 있는 전적인 거리감을 완전히 없애시는 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청하시는 것이 거절될 리 있겠는가? 모든 것은 틀림없이 허락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분께서 청하시는 것을 항상 들어주신다. 이와 같이 우리 대언자의 기도는 완전하게 받아들여진다. (Mr. T. G. Bellet, 아더핑크 요한복음 강해 p.943)

17:1-5 :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
17:6-19 : 제자들을 위한 기도
17:20-26 :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

[요 17:1-5]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1
 예수님은 아버지께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영화롭게 해주시기를 간청한다(5절). 예수님은 중보자로서 이를 아버지께 간청하고 있다. 예수님과 달리 나는 스스로의 의를 드러내려하지 않는지 돌아보게 된다.
 에수님은 이 간청을 하는 근거를 제시한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수단이 아님을 보이신다.
 먼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다(1절). 나는 과연 세상에서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잊고있지 않은지 돌아본다. 이것은 한편으로 택함 받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구하신 것만이 아니라, 영화롭게 하셨다(4절).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일을 이루심으로 성취되었다. 최근 기독교인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지 못했기에 많은 비난을 받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의 거룩한 삶, 그리고 이를 위해 애쓰는 모습에서 나옴을 기억하겠다.
 때가 되었기 때문에 영화롭게 해주시기를 간청했다(1절). 기도할 때 항상 아버지의 때를 기다렸는지 돌아본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영광으로 승천하시어, 성령을 보내주셨다. 성령을 통해, 그를 보내신 아버지와 아들을 알게되어 영생을 얻는다. 즉,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으로 영생을 얻는다(3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고,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 더욱 간구하겠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신 주님을(1절) 본받아, 공경과 신뢰의 자세로 기도하겠다.

[요 17:6-12]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2
 이 구절은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지만 그 중에 세가지만 써보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데, 그들을 매우 칭찬하신다(7절). 사실 돌아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끌려가셨을 때 세 번이나 부인했고, 제자들은 모두 두려워 흩어졌다. 그들은 그토록 연약했음에도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살피고 칭찬해주셨다. 사실 돌아보면 우리의 믿음은 항상 약하다. 주님을 져버릴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예수님은 칭찬해주신다. 이는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된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근거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로 말이암아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이다(10절). 앞서 1절에서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1절).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거룩하지 못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기도를 하셨다. 이는 어마어마한 은총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다른 측면에 집중하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을 위해 하셨고, 그에 순종하시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도 아버지와 아들의 뜻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 자꾸만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이 끼게 된다. 그러나 내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임을 기억하며 나의 의를 죽여야 한다.
 또한 예수님은 세상에 더 계시지 않기에,개인적인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11절). 예수님은 이토록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분이시다. 이를 깨달을 때마다 위로와 은혜가 충만하다.

[요 17:13-19]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3
 앞서의 내용을 뒷받침하여, 제자들을 위한 청원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이 누리는 기쁨을 충만히 갖도록 하셨다 (13절). 예수님은 세상 안에 계셨으나 세상에 속해있지는 않으셨다. 그런 예수님께서 누리는 기쁨은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기쁨이었다. 그 기쁨을 우리에게 전해주신다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충만한 은총을 누리고 그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중재자 역할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시다.아버지와 사귐이 있을 때 우리에게는 기쁨이 있다.
 이 기쁨을 누린다는 것은 우리도 역시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됨을 의미한다 (14, 16절).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내게 됨을 의미한다 (18절). 그런 우리는 세상의 미움을 살 수도 있다 (14절). 그러나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미움받을 때 우리는 점검해야 한다.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인 것인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충만히 갖고 있지 않기에 당하는 것인지. 만약 전자라면 우리는 그것을 버텨야 한다.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보전하심을 기억하자 (15절).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해야함을 기억하자. 기도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을 보고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요 17:20-26]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4
 예수님은 제자들 뿐 아니라, 믿는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특별히 나는 22절의 말씀에 집중하게 된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여기서의 영광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영광은 아니다. 그것은 성육신하신 자로서 얻으신 영광, 세상에서 이루신 일에 대한 영광을 가리킨다.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다. 물론 이는 미래에 받을 영광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을 믿어야 하며, 그 은혜에 감격해야 한다. 동시에 나는 그 영광을 입은 자로서의 자세에 집중하게 된다. 하나님과 연합한 자에 걸맞도록 거룩해야 함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인이라 말하지만, 거룩하지 않은 많은 이들을 본다. 우리의 행동이 아버지와 예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해야한다. 이를 위해 간구해야한다. 나는 얼마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아버지께 구하고 있는가?

2015년 1월 22일 목요일

요한복음 16장

[요 16:1-11] 그리스도를 변호하시는 성령
성령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심판을 책망하실 것이다(8절). 이는 성도의 회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습에 대한 것이다. 세상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를 거절하는 죄를 지었다(9절). 그 예수님은 의로우신 아버지 우편에 앉으셔서, 그분을 버린 세상이 의롭지 못함이 증명되었다(10절). 성령께서 세상에 계심은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즉 이 땅에 계신 성령은 세상의 임금인 주님을 심판했다는 증거가 된다(11절). 그러므로 성령께서 이 땅에 계신다는 사실 자체가 세상이 책망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떠나시며 보혜사를 보내시기로 약조하셨다(7절). 세상이 주님을 버리는데, 주님은 끝까지 세상을 사랑하셔서 성령마저 보내시겠다 약속하신 것이다. 그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근심했다(6절). 제자들은 당장 앞의 현실에 눈이 가리워져 하나님의 큰 계획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 특히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큰 계획을 보고, 세상에서 어떻게 증거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족하지 않도록 이미 알리셨다(1절). 내가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핍박당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아버지의 자녀임이 확증되는 사실임을 기억할 수 있도록 더욱 말씀을 가까이 해야한다(4절).

[요 16:12-22]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성령
 삼위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동등하시다. 그러나 경륜적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을 보내시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더 크다. 13절에서 이것이 잘 드러난다. 성령께서는 성부, 성자와 동등하시지만, 자신을 임명하신 분께 충실하신다. 오직 들은 것을 말하신다. 심지어 성령께서도 그러하신데, 인간인 우리는 어찌해야하는지는 명백하다. 내 생각을 알리는것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말씀을 전해야 한다.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오셨다 (14절). 그리스도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이신다 (고전2:10).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 성령의 강림을 말씀하신다 (16절). 그러나 제자들은 깨닫지 못한다 (18절). 말씀을 읽지만 깨닫지 못하는 것은 제자들만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비롯한 현대인들에게도 동일한 문제다. 제자들은 당장 감당하지 못하지만 (12절), 이후 성령께서 진리로 인도하셨다 (13절). 우리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성령께서 깨닫게 인도하실 것이다. 다만, 끌고가는 것이 아니라, 인도임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순종이 필요한 부분이다. 또한 그 은혜는 갈급하는 자에게 더욱 풍성한 것이다. 그러할 때 성령께서 더욱 풍성한 지혜를 허락하실 것이다.

[요16:23-33] 그리스도의 마지막 위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게된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는 예수님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며, 하나님을 알게된다. 이는 성령께서 강림한 후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더욱 충만하게 이루어질 것이다(23절).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더욱 깊이 알게 되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된다(24절). 그 가운데 얼마나 큰 기쁨이 있는지 말씀하신다(24절).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진정 구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내게 미치고 있는 것이다(27절).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보자로서 아버지께 고하기 때문이 아니다(26절).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 우리에게 함께 미친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은혜이며 위로인가!
예수님은 다시금 세상을 떠날것이라 말씀하신다(28절). 칼빈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그 말의 풍기는 향기로 인하여 그들은 새로운 힘을 회복했다." 물론 제자들의 믿음은 온전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 다만 이 세상에서 많은 시험을 겪으며 그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해나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실 때에, 아버지와 함께 계심을 말한다(32절). 제자들이 낙담할 수 있는 상황을 예비하여 이 말씀으로 위로하신다(33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할 때 그 위로를 충만히 누리게 된다. 그 말씀으로써 더욱 담대히 나아가겠다.

2015년 1월 6일 화요일

요한복음 15장

[요 15:1-6]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1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에서 거듭 포도나무에 비유되었다(사5:1,2,7;호10:1). 하나님은 귀한 포도나무를 심으셨는데, 그 포도나무가 악한 가지가 되었다(렘2:21). 그러나 매번 실패한 이스라엘과 달리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이시다(1절). 그리고 아버지는 포도나무를 보호하시는 농부이시다(1절).
 그런 예수님께 붙어 있으나, 열매맺지 않는 가지를 아버지께서 버리신다(2절). 아버지께서는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요5:22;계20장). 따라서 여기서 아버지께서 버리시는 것은 구원을 받지 못함을 의미한다 보기 어렵다. 또한 "무릇 내게 붙어 있어(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새번역)"라고 표현되어, 예수님께 붙어 있음이 분명 표현되고 있다. "그것을 제거해 버리"신다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제거한다는 헬라어의 "아이로"를 번역한 것이다. 아더핑크는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단어를 "lifted up(들어 올리다)"로 번역함을 지적한다. 이렇게 해석하자면, 예수님을 믿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를 아버지께서 들어올려 보살핀다는 의미가 된다. 예수님은 14장에 이어 이 말씀을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 즉 믿는 제자들에게 설파하고 있기에 이는 더욱 설득력 있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도록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2절).
 2절과 3절의 "깨끗함"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2절은 열매에 대한 얘기다. 즉, 믿음의 결실이 나타난 자를 칭찬하시며, 더욱 거룩하게 성장하도록 만들어가는 "깨끗함"이다. 반면 3절은 의롭다 여김받은 우리의 신분을 가리키는 "깨끗함"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깨끗한 자이다.
 그러하므로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한다(4절). 물론 모든 성도는 예수님 안에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음"은 권고받지 않는다. 그러나"거하다"는 다르다. 이는 하나님과 사귐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권고된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은혜를 받는다. 그리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이다. 즉,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며, 진리를 가르치신다. 우리가 얻는 열매는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 예수님과 떨어져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밖에 버려져 마른다(6절). 즉 맛을 일은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된다. 예수님을 믿되, 그 영향력이 하나도 드러나지 않게 된다. 이어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는 말씀을 아더 핑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그들이 그것들(가지처럼 버리워진 자들에게서 나온 것들. 죽은 것들)을 모아다가 불태우신다." 여기서 불태움을 또한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3:15)"는 말씀으로 연결한다. 즉, 소돔과 고모라를 불에 태워, 구원받은 롯과 같이 말이다.
이와 같은 말씀 해석에 비추어 바라보겠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에서 속죄함을 받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는다. 그리고 회개한다. 반복한다. 그런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좌절한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를 통해, 행위를 통해 이 굴레를 조금씩 탈피하려 한다. 그런데 그 깨끗하게 되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렇게 만들때 되는 것이다. 예수 안에 붙들려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나 스스로의 힘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나의 무능을 깨닫고 주님을 붙드는 것이다.

[요 15:7-16]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2
 종에게 "앞으로 친구로서 지내자." 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큰 사건인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이것이다(14,15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기에 가능한 것이다(16절). 나를 사랑하셨기에 택하셨다. 우리는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참된 성도의 모습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우리의 기도는 이루어진다(7절).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이므로. 포도나무에 붙들려 있을 때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그 열매에는 내가 자랑할 여지가 없다. 난 단지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맺는 열매는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8절).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9절).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말씀하신다(10절).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나의 기쁨의 근원이 된다(11절).
정리하면,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열매로 드러나게 되며, 그 자의 간구를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를 간절히 원하지만, 우리의 육신이 약하여 그러지 못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경험하는가(막14:38)! 그러나 우리 마음속의 그 불협화음을 아버지께서 주관하시어 더욱 주를 바라보고 그 사랑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신다는 말이다. 돌아보면,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배신한 탕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돌아오기를 바라시며, 우리가 돌아올 때 사랑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 가운데 실수하더라도 끝없이 사랑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얼마나 큰가! 내가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용서하셔서 성장하는 내가, 조금 자랐다고 해서 어찌 자랑하겠는가!

[요 15:17-27] 제자들을 격려하시는 그리스도
 세상은 성도들을 미워할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속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움받을 때, 예수님께서(주인) 먼저 박해를 받으셨음을 기억하며 더욱 예수님께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예수님을 증언하실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박해 속에서도 신령한 복을 확신하며 성도로 살아갈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사회의 질타를 받고 있다. 이는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다. 그러나 정화된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핍박 받을 것이다. "왜 너희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데? 왜 다른 종교와 화합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사회에 공헌을 많이 했는가와 별개로 주어지는 문제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것이라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서 더욱 믿음을 굳건히 할 수 있다.
 탕자가 아버지의 곁을 떠났을 때,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런 세상이 아버지의 품에 있던 사실에 불만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성도는 그런 자신을 받아주셨다는 사실에 감격해야 한다. 그리고 그 품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인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할 때 우리가 당할 세상의 미움을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11월 11일 화요일

요한복음 14장

[요 14:1-11]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그리스도 1
 아더 핑크의 1절의 해석에 크게 공감한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셨으나, 이제 떠나셔야 한다. 제자들이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떠나시더라도 예수님의 존재와 사랑과 돌봄을 온전히 믿으라는 명령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온전히 죄사함을 받는다. 오직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게 됨을 기억해야 한다(2절). 우리는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지낼 것이다(3절). 4절은 존브라운의 주해를 요약하겠다. 13:36에서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 집으로 가신다. 4절의 말씀은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곳에 갈 수 있도록 준비하러 가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준비가 완성되면 제자들을 데리러 오실 것이다. 예수님이 어디로 가실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예수님을 의지해야) 그곳에 갈 수 있는지 알리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로 가는 길, 그 경로를 알리신 것이다. 그러나 도마는 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5절),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오직 예수님 자신을 의지하여 우리가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6절). 더 나아가,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리신다(7절).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과 다름없다. 오늘날 성도들은 예수님을 보지못하는데도 사랑하며 믿는다. 그런 자들을 예수님께서는 더 복되다고 말씀하셨다(20:29). 그러나 여전히 빌립은 이해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보여달라 하기에(8절), 예수님께서는 책망하셨다(9절). 그리고 이어 10절에서 예수님과 하나님의 완전하고 친밀한 일체를 공표하신다. 설령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라는 사실을 말로써 믿지 못할지라도, 예수님께서 행한 일을 통해서 믿으라고 말씀하신다(11절).


[요 14:12-20]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그리스도 2
 12절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는 말씀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모든 성도들이 이적을 행할 것이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떠나셔서 절망할 수 있는 제자들을 향한 위로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에, 또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행하겠다고 약속하신다(13절). 즉, 제자들이 예수님이 공생애동안 하신 것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되는 것은(12절),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그들의 요청에 응답하셔서 함께하심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13절). 즉, 기도는 하나님과의 거리감을 없앤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할 때, 예수님과 연합해야 하며, 예수님의 공로를 근거로 해야한다(14절). 또한 그의 영광이 되는 것만을 기도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자기의 뜻을 제쳐두고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아더 핑크) 즉, 기도를 통해 믿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 믿음의 원천은 사랑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즉 믿는 성도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은 계명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15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16절). 예수님은 성도를 사랑하시기에 결코 놓지 않으신다. 그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17절). 말씀에 기반하여 우리를 감동시키신다. 또한 성령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신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실 것임을 약속하셨다(17,18절).
예수님은 곧 십자가에 박혀 죽으실 것이다(19절). 제자들은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기도 했지만, 하나님 우편에 계심을 믿음으로 보았다. 그 바라볼 수 있는 근거로서 "살아 있"음을 제시했다. 즉, 하나님을 믿고 거듭난 자는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하되어 있기 때문에 보는 것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그의 생명이 내 안에 있음을 말씀하신다(20절). "그 날", 오순절에 제자들은 이를 깨달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 우리는 알게될 것이다.


[요 14:21-31]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그리스도 3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21절).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조건으로 예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 계명을 지키는 것을 말씀하신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지킬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자에게 계명을 지키는 자라 말씀하신다. 그런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며, 시험에 처할 때 위로를 얻는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인 아닌 유다'가 예수님께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라 묻는다(22절). 물론 이에 대해 17절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으나 깨닫지 못하고 묻는다. 이에 에수님은 다시 친절히 대답하신다(23-24절).
 예수님은 21절을 더욱 발전시켜 대답하신다. 성도는 단순히 예수님의 계명(명령)만이 아니라, 그의 말을 지키는 자다(23절). 그 축복은 예수님께서 나타내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거처를 함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23절).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예수님의 말을 지키지 않아) 예수님께서 나타내실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의 말씀이기 때문이다(24절).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하도록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다(26절). 아버지께서 자신을 알리기 위해 예수님을 중보자로 보내신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어 아버지와 아들을 알리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진노에서 건지셔서 우리에게 평안을 끼치신다(27절). 이에 그치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서 누리셨던 평안을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다(27절). 우리는 이 평안을 누리기에 세상이 우리를 증오하고 공격하더라도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끼치시기 위해 죽으셔야 하므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부활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에게 설명하신다(28절). 아버지는 예수님보다 크다. 이는 그의 존재가 열등하다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뜻 안에서, 아버지께 보고하는 중보자로서의 직무를 취하신 겸손을 뜻하며, 동시에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세상의 수치를 받는 그의 상태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상태와 비교한 것이다. 그런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일이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 모든 말씀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온전히 깨닫지 못했으나, 성령께서 오셔서(26절) 그들이 깨닫고 믿게 하실 것이다(29절).

2014년 10월 29일 수요일

요한복음 13장

[요 13:1-11]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1절) 우리를 사랑하셔서 종의 몸을 직접 취하셨고,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4절) 예수님은 자기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드셨으나, 여전히 우리는 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5절) 이는 앞서 12:3절에서 예수님의 발을 향유로 씻은 것과 대비된다. 예수님은 온전히 거룩하시기에 영광을 받으셨으나,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나 여전히 이 땅에서 죄를 짓기 때문에 물로 씻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를 이미 성도로, 거룩하다고 인쳐 주셨기 때문에, 발만 씻으면 된다.(10절)
 우리는 이 땅에서 점진적으로 거룩해져야 한다.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셨으나, 우리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나 여전히 악을 행한다.(롬7:21) 우리는 점차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해져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도움으로만 이루어진다. 베드로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발을 닦을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닦아 주셔야 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자기 발을 맡겨야 했다. 나는 연구실이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 말씀 생활을 게을리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믿는 것인지 바른 신앙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나 자신을 그리스도 앞에 쳐서 복종하여 나아가야 할진대, 나는 너무도 교만하여 뻣뻣하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기 보다는 내 편의에 따라 행동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내 발을 맡겨야겠다.


[요 13:12-20]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
 제자들은 예수님을 "선생이라 또는 주라" 불렀다.(13절)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하셨다.(13절) 사실 예수님은 그것을 넘어서신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중보자이시다. 그런 예수님을 "예수"라고만 부를 수 없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진실된 존경과 사랑이 담겨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12절)고 물으셨다. 그 의미는 우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14절) 발을 씻어주는 것은 겸손한자만이 할 수 있다. 사랑이 충만해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누군가 실수하고 모난 행동을 하더라도 우리는 발을 씻겨주어야 한다. 발은 더럽기 때문에 씻겨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을 묵인하라는 것이 아니다. 사랑으로 권면하며 씻어주어야 한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난 닮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아셨음에도(18-19절) 그를 배척하지 않으셨다. 이런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조금씩 깨닫는다.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까지 나를 사랑하시고 인내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면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요 13:21-38]그리스도의 경고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버릴 것을 이미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 유다는 공생애 내내 예수님의 완전하심을 봤다. 그러나 그는 변하지 않았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건,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기 때문임을 믿을 수 밖에 없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인가! 예수님은 유다에게 배신 당할 것을 아셨기에, 한 영혼의 타락을 알기에 괴로워 하셨다(21절). 그때 제자들은 누가 배신할 지 몰랐다(22절). 예수님은 유다가 배신할 것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모질게 대하지 않으셨기에 제자들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누가 배신하는지 요한에게 물어보러 했고(24절), 요한은 예수님 품에 누워(23절) 물어보았다.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라고 적었다. 그는 겸손하여 결코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또한 우리는 요한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의 품 안에 머물러야 한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떡을 주셔서 배신할 자를 알리셨다(26절).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이 사실을 알리셨으나, 유다에게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28절). 어떤 이들은 명절에 쓸 물건을 사라는 것으로, 또는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기 위해 물건을 사라는 것으로 이해했다(29절). 예수님은 원하신다면 이적을 행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구입하셨다. 누구에게 구걸하지도 않았고, 어렵지만 절약하여 일상을 해결해가셨다. 그뿐아니라 그 와중에도 어려운 이웃을 도우셨다. 이어 예수님은 사랑을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 부요한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분이다.
 예수님은 곧 다가올 죽음을 영광이라 말씀하신다(31절). 온 역사가 지켜보는 위대한 사건이며, 원수를 멸하셨다. 또한 불순종한 아담과는 달리 순종하셨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며 또한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영광을 받는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32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셨다(34절). 그리고 그 사랑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증거라 말씀하신다(35절). 유다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같이 보낸 자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교회에 다닌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자녀라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자녀가 아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사랑이 부족하다. 그러나 내가 점차 하나님을 본받으며, 그 사랑을 느낄 때, 우리에게는 그 사랑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난 얼마나 사랑이 없고, 비방하기 좋아하는 자인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낮아져야만 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는 곳, 제자들이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33, 35절). 그러나 베드로는 목숨까지 버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다(36절). 사실 베드로는 얼마나 용감한 제자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그가 예수님을 3번 부인한다. 우리가 강한 것이라고 자랑하는 것도 얼마나 연약한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의지를 먼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겸손히 받아들여야 한다.

2014년 8월 26일 화요일

요한복음 12장

[요 12:1-11] 베다니에서 그리스도께 향유를 부음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다. 이전에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분주하게 일을 했고, 이에 대해 꾸중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마르다는 다시 열심히 "일을" 했다.(2절)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했고, 그 가운데 일을 했다. 음식/잔치 준비는 마르다에게 주어진 큰 은사였다. 자신이 가진 은사를 그리스도를 위해 바치는 것은 너무도 아름답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우리를 평가하는 요소가 아님을 깨닫는다. "나는 진정 예수를 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었다.(2절)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인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게 되는지를 명백히 보여주는 구절이다.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았다.(3절) 향유의 가격은 노동자의 일년 임금정도였다.(5절;마20:2) 이렇게 귀한 것을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바쳤다. 나사로가 부활한 직후도 아닌 이 시점에서, 마리아의 행동은 결코 충동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없다. 마리아는 심사숙고했고, 예수님은 이렇게 귀한 것으로 영광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녀의 예배는 향기로웠다.
 가룟 유다는 이것으로 마리아를 비난한다.(4-5절) 그러나 그는 돈궤를 훔쳐간 자이며(6절), 은 30냥에 예수님을 판 자이다. 그는 "가난한 자"를 핑계로 돈에 대한 아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NASB를 보면 1절에서 예수님이 베다니로 간 것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와 함께 표현된다. 이는 앞 장에서 예수를 죽이려는 가야바의 음모에 대응하는 구절이다. 즉 예수님은 여기서 가룟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며, 자신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마리아가 향유를 바칠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7절) 부패한 마음을 따라 행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진행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우리는 위로를 얻는다.
 이웃을 사랑하며 그들을 돕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예수님은 작은자에게 한 것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도 말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을 소홀히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는 곧 죽으시고 승천하실 것이기에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8절)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이 땅에서의 삶이 그리 길지 않음을 자각하고, 더욱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스스로를 촉구해야 할 것이다.


[요 12:12-19]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산나(지금 구하소서)"를 외쳤다. 그들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으라 외쳤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 성경을 이루기 위해 행해졌다.
 ①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창49:10-11) : "규"는 종족의 권세를 상징하는 지팡이다. 본문에서 유다 지파로부터 중보자가 나와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 예언되어있다. 나귀가 매이는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이며(사5), 암나귀 새끼가 매이는 포도나무는 그리스도이시다(요15:1).
 ②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것이요"(단9:25) : 이레는 7일을 의미하며, 7년을 상징한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의해 예루살렘이 회복된 후 예수님이 오기까지 69이레, 483년이 걸릴 것을 예언했다.
 ③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 나귀를 타고 오실 것을 예언했다. 멍에를 메지 않은 짐승만이 희생제물로 쓰일 수 있었기에(민19:2;신21:3),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다(15절).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에게 버림받으셨다. "기뻐"함을 받게 되는 것은 재림 때 성취될 것이다. 공의의 심판은 재림 때 이루어질 것이며, 초림때는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자비로 오셨다. 그러므로 15절에서는 이는 생략하고 본문을 인용했다.("겸손하셔서"도 생략했는데,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큰 의도였기에 생략한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계셨으나, 그 전에 그의 존엄한 인격이 드러나야 했다. 이스라엘이 십자가에 못박는 자가 누구신지를 명백히 드러내어, 그들의 죄가 더욱 변명할 여지가 없음을 확고히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오셨다. 이방인들은 병마를 의지했으나(신17:16;시20:7), 예수님은 율법에 순종하는 분으로서, 종의 신분으로서, 낮은 자로서 오셨다. 그 나귀조차 빌린 것이었다. 나는 무엇을 의지하는가?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 세상의 것들에 의존하고, 모든 것을 방어하려하지는 않는가? 참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한다고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단호히 "네"라고 답할 수 없는 내가, 이 연약한 믿음이 부끄럽다.


[요 12:20-36]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찾음
 예수님은 다윗의 아들로서, 메시야로서 오셨다. 그리고 자신을 믿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이는 앞의 육적인 관계가 아닌, 영적인 관계로 맺어진다.
 이전 본문에서는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바리새인의 모습이, 이후에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려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 사이에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이방인의 모습이 나타난다.(20-21절)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자로 오셨기 때문이다.
 이는 죽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의 죽음으로 사탄은 권세를 잃을 것이며(31절), 그는 영광받으실 것이다.(23절) 그의 영광은 죽음으로 이루어지기에 "영광을 얻을 때"라고 말씀하신다.(일차적으로는 이방인에게 영광을 받으신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둘째 아담으로 오셨다. 죄로 가득한 다른 인간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그러니 이 둘 사이에 자연적인 연합은 이루어질 수 없다. 죄 많은 인간과 죄 없으신 하나님은 함께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죽으셨다. 그의 죽음으로 열매를 맺어(24절), 성도를 이끄신다.(32절)
 예수님은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셨다. 세상의 빛이며, 생명인 예수님조차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죄로 가득찬 우리의 생명을 아끼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지금 내 육신은 죄로인해 하나님과 유리되어있는데, 진리앞에서 이 썩어질 몸을 아끼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25절) 이를 인정하나 내 몸은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진리도 진리이지만, 먼저 내 몸 건사해야하지 않겠는가'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킨다. 그러니 나는 기도한다. "하나님. 저는 이토록 믿음 없는 자입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바도, 응답하시는 바도 잘 듣지 못하는 자입니다.(29절) 그러면서 다윗, 히스기야, 요시야와 같은 의인들이 때로 하나님의 응답을 잘 듣지 못할 때, 조롱하기 좋아하는 자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제 의를 자랑하기 좋아하는 자입니다. 이런 제게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저를 직접 인도하지 않으신다면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32절)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겨주셔서 바른 길로 인도해주시는 것이 제 유일한 소망이오니(26절),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따를만한 믿음을 제게 주옵소서. 세상의 허망한 것을 보지 않고, 오직 영원한 상급을 보게하옵소서."


[요 12:37-50] 그리스도의 공생애에 대한 회고적 개괄
 우리의 불신을 살펴봐야한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셨으나 많은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고(37절),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이사야의 예언(사53장)이 성취되었다. 하나님께서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권능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시면 결코 우리는 믿지 않는다.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단념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믿을 수 없게 되었다.(40절)
Blogger Tips And Tricks|Latest Tips For Bloggers Free Backli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