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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7일 수요일

마태복음 2장

[2:1-12] 동방박사
 본장은 다른 복음서에 나와있지 않는, 마태복음만이 포함하는 내용이다. 찬찬히 내용을 살펴보자.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 이는 성경에서 예언된 바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 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개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 5:2)

 베들레헴에서 나실 자가 영원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통해, 그분이 하나님임을 증거한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이다. 그렇다면 이 예언에 대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몰랐을까?
 그렇지 않다. 그점은 4-6절에 나타난 대제사장과 서기관의 답변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그토록 성경에 대해 박식한 지식을 갖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지식을 갖추고 있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놀라운 사실이다.

그에 반하여 동방박사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에서(베들레헴) 계시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나 경배하러 왔다.(2절) 그들은 지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있었다.

 동방박사와 대제사장/서기관의 대조는 내게 두가지를 가르쳐준다.
 1) 믿음이 없는 지식은 헛되다. 영국 교회의 몰락은 여기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2) 그러나 지식 없는 믿음은 초라하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서 정확히 어디서 탄생하실지 알지는 못했으나 탄생하신다는 계시를 보았고 이를 믿었다. 우리가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 지식이 있어야 믿을 수 있다. 그 지식이 없다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초라한가! 오늘날 조국 교회가 그렇지는 않은지 안타깝다.

 동방박사는 너무도 큰 은혜를 준다.
 1) 구약에서도 끊임없이 나오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택한 것이 아니다. 이방인을 믿는 자로 택하셨다. 이 사실은 로마서 11장에서 나타나듯, 내가 하나님을 믿기만 한다면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풍성한 언약들이 내게도 주어진다는 감격이다. IVP 배경주석에서는 동방박사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교도일 것으로 가정하나, 나는 J.C.라일의 견해(동방박사들도 신자다)에 더욱 동의한다. 어찌 믿지 않는이가 경배하러 그 고생을 하며 왔겠는가!
 2) 하나님은 믿는자를 항상 남겨두신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믿는자가 '나만 남았'(왕상 19:18)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명을 남기셨다고 하시지 않는가! 오늘날 조국 교회의 좋지 못한 면모들이 많이 보인다. 참된 신자가 없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께서 참된 신자를 남기셨다는 사실은 큰 위로를 준다.
 3) 교회에 다닌다고 모두 은혜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어릴 적 그 은혜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사실이 너무도 한탄스러웠고, 이를 깨닫기를 바라는 기도를 몇년간 했다. 갈급하지 않는자에게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겠는가.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율법을 가까이 하는 특권을 지닌자들이다. 그들은 은혜의 수단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이다. 오늘은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이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오히려 가까이 있어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은혜를 누리지 못할 때가 많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 더욱 깨어있어야겠다. 그러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깊이 자각하고, 더욱 자기 부인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4) 동방박사들의 여행은 힘들었을 것이다. 수많은 교통편을 이용한채 유럽여행을 한 것도 힘들었는데 당시에는 어떠했을까. 그럼에도 그들은 기꺼이 그리스도께 경배하기 위해 그 노력을 감수했다. 영광에 직면하는 일이기 떄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아직 우리는 온전히 보지 못했으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이루어진 것임을 확신한다. 나는 그것이 믿음이라 생각한다. 예수에 대한 확신. 동방박사들의 믿음은 얼마나 숭고한가!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로 바라보는 하나님의 본체는 얼마나 고귀하며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리고 아기 예수를 보고 구세주임을 확신하는 동방박사들의 믿음이 너무도 귀하며 본받고 싶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11:1)
 5) 예수님은 유대 고을 중 작은 마을인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그러하기에 베들레헴은 가장 작지 않은 마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약한자들을 돌보신다. 그러하다면 주위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은 성도의 마땅한 자세가 아닐까? 나는 어떠한가?
 6) 하나님께 가장 존귀한 것을 바쳐야 한다.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께 올리는 일이 예배라 믿는다. 동방박사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쳤다. 그뿐아니라 그분을 접견하러 가기 위해 안내하는 별을 보고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다. 예배드리는 나는 예배를 그토록 기대하며 또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바치는가? 그것이 내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선물임을 기억하면서 바치는가?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7)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할바를 알리신다.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 것을 지시한다.(12절) 이러한 세밀한 음성에 우리는 귀기울여야 하며 마땅히 그 뜻을 따라야하며, 주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이 필요하다.

* 배경 설명 : 대제사장은 주로 부유한 귀족층인 사두개파에 속해 있었다. 여기서 사용된 것처럼 좁은 의미의 '서기관'은 유대교 법전에 정통한 전문가로서, 상당수가 율법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했다. (IVP 성경배경주석)


[2:13-23] 애굽으로의 피난
 헤롯왕이 아기들을 학살한 것은 너무도 끔찍한 사건이지만, 이 또한 구약에 예언되어 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렘31:15)

 또한 아기 예수께서 애굽으로 피난간 것도 예언된 사실이며, 이 모든 말씀은 주의 말씀을 '이루려 하'(15절)는 과정 속에 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호11:1)

 또한 예수님께서 나사렛으로 가시는데, 이 또한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23절)기 위한 약속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대한 해설은 아래에 다시 쓰겠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마태복음 2장은 특별히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증명하기 위해 쓰여진 책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복음서는 다양한 관점으로 쓰여져 각 권은 풍성한 계시를 만든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헤롯은 예수를 죽이려 한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를 더욱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오시는 만물의 주인이심을 잊었고, 내 알량한 위치를 뺏으러 오신 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위치가 그만큼 높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아닌가. 그리고 헤롯과 같은 자들은 항상 그리스도와 그의 자녀들을 핍박한다. 그러나 인간의 핍박은 한계가 있다. 인간은 죽게 마련이다. 여태껏 수많은 핍박이 있었다. 콜로세움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죽었고, 퐁텐블로성에서 까뜨린느 메디치에 의해 수많은 개신교도들은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돌이켜볼 때 그런 핍박에서 진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세상의 핍박은 끝이 있다. 우리는 이를 알기에 동요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 힘들 때, 그 고통을 동일하게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로하시지 않는가.
2장과 3장 사이에 흐른 시간은 약 30년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에서 30년 가까이 사셨던 인생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생의 대부분을 가난한 자들과 함께 지내셨다. 이 세상의 위대한 것을 추구하며 살지 않았다. 겸손한 자세로 직면한 상황에서 사셨다. 나는 위대한 것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충분한 능력이 있기에 그것을 발휘할 수 있도록 위대한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스스로 돌아보며 회개한다. 더욱 낮아져야겠다. 아더 핑크는 생전에는 그저 작은 마을에 있는 약한 목회자였다. 그러나 그의 저서들은 오늘날 얼마나 꽃을 피우는가! 내가 하는 작은 일이 주를 위하는 일이며, 나의 일을 통해서 주님께서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님은 자신을 높이신다.

* 마 2:23
and came and lived in a city called Nazareth This was to fulfill what was spoken through the prophets: "He shall be called a Nazarene." NASB
 즉 구약의 한 선지자가 아닌, 선지자'들'이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사렛 사람으로 오신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를 증거할 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것이 날수 있느냐'(요1:46)라고 반문한다. 나사렛은 그런 곳이다. 작고 외진 마을이며 약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이사야 11장에서 예수님을 증거할 때, 그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 말한다. 잘려진 줄기, 뿌리에서 나는 싹과 가지는 크게 자랄 수 없다. 그렇게 낮은자로 오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하나님 나라를 완성할 것이며, 공의로 심판하신다고(3-4절) 말씀하신다. 낮은자로 오시나 가장 높은 분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다. 죄인의 친구로 오시어 비천한 몸을 입으셨으나 가장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분이다.
 이 세상에서 멸시를 당하고 고난을 당한 예수님은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사53:2) 그 어떤 권세나 부귀를 갖추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렇게 오셨으며,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을 더욱 잘 아신다.

 또는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이 철자를 조금 바꾸어 나실인을 가리킬 수도 있다. 사사들과 나실인은 또한 그리스도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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