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20] 참 그리스도인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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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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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에서 기독교인에 관한 근본적으로 추상적인 정의를 다루어 왔다면, 이제부터는 기능적인 정의를 다루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앞에서 팔복에서 언급한 것들이 현실 속에서 구체화되며, 세상에 그 성품이 드러나야 한다. 즉 기독교인은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지중해는 매우 따뜻한 곳이었기에 고기를 부패하지 않게 하는 소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 세상은 죄가 넘치는 곳이기에 그리스도인의 소금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
1)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이 세상 속으로 침투 시키도록 허용해야 한다. 때로는 우리의 이익을 포기하고 기독교인들이 많이 없는 곳으로 내던져질 때도 있다. 우리는 그 곳에서 감당해야할 소금의 역할이 있다.
2) 우리를 통해서 불신자들은 예수님을 본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활기차고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소금이 그렇듯 우리는 향기를 제공해야 한다.
3) 우리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갈증을 느끼도록 자극해야 한다. 세상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갈증은 예수님께서 만족시켜 주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
소금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흔한고 약한 것을 통해 영광을 나타내신다. 흙을 통해 인간을 만드셨고, 광야의 불타는 떨기 나무로 계시하신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해방시키셨다. 그렇기에 나를 부르셨다. 얼마나 감사한가!
묵상 :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요14:9) 예수님과 하나님은 동일한 본질을 소유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나를 본 자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내 안에 성령께서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은혜를 주께서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 우리는 그가 하셨듯이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한다. 내가 주어진 환경 속에서 거짓된 삶이 아니라 정직한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의무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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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6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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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세상이 영적인 일들에 대하여서는 어둠 속에 잠겨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악하지만, 믿는다고 하는 많은 이들도 이 사실을 인정하시 않으려 한다. 그러한 어둠 속에서 예수님께서 빛으로 악의 본질을 드러내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둠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예수를 미워했고 핍박했다. 예수님은 빛이시다.(요1:4) 우리는 어둠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빛을 주시며, 우리가 그 빛을 반사시킬 수 있게 하신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빛이 될 수 없다. 성경에 자주 묘사되는 등불과 촛불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점화가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약한 자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을 도울 수 있다. 빛을 통해 식물이 자라기 때문이다. 우리를 빛으로 부르신 까닭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빛을 통해 세상에 밝히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 빛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많은 사람들을 인도해야 한다.
묵상 : 산상수훈은 계속 우리는 악하지만,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사실을 계속 언급한다. 내가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 이유,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이유를 자꾸만 언급한다. 그리고 그 연합을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이 원래의 본성이 아닌 하나님께서 자녀에 합당하도록 이끄시는 대로 변화되어간다는 실제적인 개념으로 보이신다. 하나님의 계시를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성은 하나님을 알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말씀을 배웠다면, 그 말씀에 순종하여 빛과 소금이 되도록 노력하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나 자신이 변화되기를 소망하고 노력하자. 우리가 그러할 때에 얻는 평화와 하늘의 복을 믿음의 눈을 통해 계속 보고 확신하고 얻게 될때에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를 따를 것이다. 그러하기에 앞에서 언급한 보상은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할 복인 것이다. 나도 하늘의 상급을 항상 기억하며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성장해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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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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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성경과 동일시 하였으며 성경에 비추어 자신의 사역을 해석하셨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는 그리스도의 권위와 다르지 않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성경을 완성하기 위해서라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 대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들을 먼저 살펴보자.
1) 성경은 절대적이다. 성경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최종적인 권위이며, 인간이 진정한 의미의 인간다운 삶(소요리 문답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을 살기 위해서는 성경에 전적으로 순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2) 성경은 가장 작은 부분에 이르기 까지 권위있는 책이다.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의 알파벳보다도 작은 의미이다.(히브리어)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3) 예수님은 성경을 완성하러 오셨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저자이심도 기억해야 한다. 구약이 완결된 후 신약 기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올바르게 해석하도록 도와주셨다.
4)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사탄의 시험에서 말씀을 인용하셨다.(마4장)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물었을 때(마11:3),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사역을 평가하도록 하셨다. 부활에 관해 사두개인이 예수님께 교묘히 질문을 했을 때, 예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마22:32)라는 말씀을 인용하셨다. 현재형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심을 기록된 말씀을 바탕으로, 그 시제로 부활 교리를 입증하셨다. 그 외에도 예수님께서는 논쟁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전적으로 성경에 의존하셨다. 예수님은 성경을 믿고 순종하셨으며, 자신이 성경을 믿은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됨을 가르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 예언을 완성하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여러가지 요구들을 만족시키고 또한 율법을 완성하셨다. 물론 예수님은 율법은 온전히 지킴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셨고(인간으로 오셔서 모든 요구를 완성하셨다),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삶 속에서 자신의 영을 통해(롬8:4) 율법을 이루셨다. 그러나 이는 부분적인 것이다. 구약 시대에 율법과 제사 제도를 동시에 둔 것은 이와 같은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인간이 율법 앞에 죄를 범했을 때 그 죄에 대해 속죄의 수단이 필요했으며,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희생 제사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즉 희생 제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예표였다. 이를 하나님께서 주신 까닭은 ①한 개인의 죄는 죽음을 의미하며(롬6:23) 무죄한 대리자의 죽음을 또한 의미한다는 사실을 오랜 세월을 거쳐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즉 제사를 통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다.②이스라엘 백성들은 희생 제사를 통해서 자신들의 영적인 죽음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또한 인식해야만 했다.
예수님은 율법 뿐 아니라 선지자들도 완성하셨다. 이는 예수님이 구약에서 언급된 자신에 관한 선언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이다. 복음서 큐티를 하며 그 예언의 성취를 계속 찾도록 하자.(예. 창3:15-여자의 후손이 사탄을 물리치신다, 창22:18-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장면에서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자기의 아들을 내어주시리라 예언하고 있다. "네 씨 안에서(그리스도) 세계 만국이 복을 받으리라", 창49:10-야곱은 유다에게 통치자와 율법 수여자의 예언을 준다, 시22편-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장면을 생생히 시각화, 시16:10-예수님의 부활, 사53-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구약 성경의 주제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다. 마틴루터의 말을 보자. "이 선언 이외에 어떤 다른 목적을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지고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죄없는 어린양이신 그는 자기 자신을 희생제사로 드림으로써 세상 죄를 짊어지고 또한 그 죄를 제거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인간을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건져내어 영원한 구원의 세계로 이끌 것이다. 성경은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을 위하여 기록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사건이 일어났다.
묵상 : 앞에서는 성도의 모습을 구원의 논리에 따른 방식으로 설명을 했고, 그 이후 성화된 성도의 마땅한 모습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러나 계속 뒷받침 된 논리는 이 모든 것을 이루시는 것은 우리 각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롬3:20에서 말하듯 우리의 죄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우리는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그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 율법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산상수훈을 묵상할수록 예수님의 가르침의 정수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은 항상 내리는 결론으로 이른다. 오직 예수. 너무 단순한 진리인 듯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얻기 위해 항상 쉽게 말씀하신다. 요3:16과 같이. 그 단순한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해야겠다. 더 장성하게 자라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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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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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는 하나님의 의 앞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존경받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엇인가를 지킴으로써 스스로의 자랑거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선함은 하나님 앞에서 충분한 선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선은 하늘나라로 데려가지 못한다.
1) 인간들이 자랑하는 의는 외적인 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면의 변화가 아니다.
2) 외적인 의는 율법의 포준을 약화시키며 많은 중요한 부분에서 율법을 무효화 시킨다. 따라서 죄가 지닌 목적(인간이 스스로 다 지킬 수 없음을 깨달아 죄인임을 깨닫는 것)을 발휘하지 못하고, 스스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여기게 한다.
3) 외적인 의는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를 영화롭게 한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
4) 인간의 의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와 다르다.
스스로 행하는 선은 아무 것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바울처럼 변화되어야 한다. 그 때 바울이 이전에 자랑했던 것(순수 혈통의 유대인,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음(난민이나 이스라엘 족속이 아님), 베냐민 지파(유다와 함께 남방 왕국에 머물러 있던 지파), 바리새인(유대 종파 가운데 가장 엄격한 교파))이 아무짝에 쓸모 없음을 깨닫고, "한때 율법에 있는 의에 관해서는 흠 없는 자라"고 이야기했던 그는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의를 본다면 우리가 행하는 그 무엇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가 아님을 보게 된다. 우리는 오직 의롭다 여김을 받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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