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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11일 일요일

마태복음 5장 21-37절(율법의 신성함)

[5:21-37] 율법의 신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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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6절)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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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까지 예수님께서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내적인 의에 대한 요구를 제시하셨으나 21절에 와서는 부정적인 관점에서 내적인 의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컨대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단지 의무감에서 행하는 행동 이상의 것이 되어야만 한다. 참된 기독교인의 윤리는 마음으로부터 솟아나와야만 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직접적인 살인 뿐 아니라 부당한 분노와 조롱도 금하는 말이다. 외적으로 행해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를 다스리고, 극복해야만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1) 우리가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본성은 우리가 범죄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를 교묘히 덮으려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이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2) 불의를 시정해야 한다. 죄를 용서해 준다는 것이 잘못에 대해 보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 속에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고, 이를 바로 잡지 않는다면 쓸모 없는 짓이다. 우리는 죄를 고백하고 우리의 죄를 시정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3) 즉각적으로 행동에 옮겨야 한다.(엡4:26) 우리의 죄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가능한 한 빨리 죄를 고백하고 시정해야 한다.
4) 하나님에게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도록 요청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때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속으로부터 변화될 것이다.(롬12:2)
묵상 : 우리가 자주 보는 말씀임에도 우리는 이 말씀을 실천하기 어렵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마지막 줄에 있듯이 그러하기에 우리는 기도해야한다.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는 권리를 주신 것은 얼마나 큰 복인가! 그러나 나는 기도가 참 부족하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나의 필요를 가장 잘 아시지만, 내가 변화되기를 원하시는 주님은 내가 그 때마다 주를 의지하며 나도 변화를 갈망하기를 원하신다. 이런 주님의 목소리에 나는 귀를 기울이는가? 더욱 주를 의지하자. 나의 능력으로 결코 선에 이를 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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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0절)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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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이들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 타당한 행위란 규범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무분별한 혼외 정사는 죄의식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물론 니체의 말처럼 죄의식이란 아무것도 아니며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죄의식은 보통 뜻하지 않은 아기의 산물이다. 더군다나 그에 따른 낙태를 하게 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낙태를 하지 않더라도 많은 아기들이 버려지고 있다. 우리는 시간과 지식의 분량에서 제한을 받기에 상황을 규정할 수 없으며, 그것이 타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오늘날 성에 대한 담론은 너무도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이혼율과 사생아가 늘어나고 있다. 결혼 생활의 파탄은 증가한다. 전두환 시절의 3S 정책, 멋진 신세계에 나오는 자유 섹스는 모두 우민화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던가! 이와 비견하기는 어렵지만 오늘날 너무도 개방적인 성 문화는 '윤리'라는 문제에 있어서 아둔하게 만들지는 않나 생각해본다.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더라도 낙태, 고아, 이혼, 불신과 같은 문제들 말이다.
물론 성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지금 시대에는 너무도 왜곡된 성 문화가 형성되어있다.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이를 피해야 한다.(29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음행을 피하라"(고전6:18)고 권한다. 디모데에게도 동일하게 권면한다.(딤후2:22) 우리는 밧세바를 범한 다윗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보디발의 아내에게서 도망친 요셉을 본받아야 한다. 밧세바를 범한 다윗의 이후 행적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똑똑히 보지 않는가! 우리가 탈세나 도둑질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내적인 증거의 도움을 받아 이성으로 그 유혹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성의 문제는 다르다. 우리는 요셉과 같이 그 '자리'에서 피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실수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실 수 있다. 그러나 최선은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다. 다윗은 그 실수를 범한 후, 늙어서 젊은 처녀로 시중을 들고 잠자리르 같이 들게 했으나 하지 않았던 것(왕상1:1-4)은 분명 이전 사건으로부터 충분한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시51편)
 그러나 피하는 것이 최종적인 해결은 아니다. 그 해결책으로 기독교에서는 결혼을 제시한다. 이 결혼은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있다는 사실을 상징할 정도로 신성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결혼에는 기독교적인 요소가 분명 드러나야한다. 그렇다면 결혼은 무엇인가?
1) 하나님께서 결혼 제도를 제정하셨기 때문에 결혼은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제도다. 결혼 생활을 통한 행복과 즐거움을 맛보게 하셨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돕는 배필을 주셨다.(창2:18) 우리는 그 배필과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창2:24)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님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임을 다시 한번 가르치셨다.(마19:4-9)
월터 A, 마이어 : "결혼 생활을 조롱하고 비웃는 것은 소인배의 마음에서 나온 보잘것없는 오류들을 하늘나라의 영원한 진리보다 더 높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결혼을 제정하셨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과 성경으로부터 결혼에 관한 생각을 얻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결혼을 통해 남편과 아내가 연합하여 한몸을 이룬다.(창2:24) 여기 등장하는 '몸'은 '전 인격'을 뜻한다. 이 연합이란 이전에 두 인격이었던 사람들이 하나의 인격을 갖게 됨을 뜻한다. 즉 결혼 관계는 아내와 남편을 하나의 끈으로 묶어주는 유기적인 관계, 손과 머리, 마음과 가슴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또한 결혼을 통하여 몸과 몸이 결합된다는 것은 정당한 성적인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결혼은 성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할 경우 나이가 들어 아름다움이 희미해지면 이혼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성적이며 정서적인 결합, 영적인 결합을 모두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의 관심을 파악하고 상대를 나의 요구대로 조각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나를 변화시켜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영과 영의 결합을 위해서는 남편과 아내가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살아있는 영으로 있겠는가!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큰 불행이다. 솔로몬은 바로의 딸과 결혼한 후 몰락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솔로몬조차도 인지하고 있었다.
"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데리고 다윗 성에서부터 그를 위하여 건축한 궁에 이르러 가로되 내 아내가 이스라엘 왕 다윗의 궁에 거하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함이니라 하였더라"(대하8:11)
3) 하나님께서 결혼이라는 제도를 주신 가장 큰 목적은, 결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남자 혹은 여자를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합시키셨으며 또한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게 하시는가를 설명하시기 위함이다. 바꾸어 말해 남편과 아내가 결혼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맺은 관계를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럼으로써 교회를 가장 사랑하시며, 교회의 신랑, 남편, 보호자, 공급자가 되시는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결혼 관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 사이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신다. 그 유기적 결합이 지니는 의미를 엡5:22-30에서 소개한다. 아내는 주님께 하듯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자신을 교회를 위해 주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6장에서 언급하는 바대로 어린 아이들도 주 안에서 부모님께 순종해야 하며, 부모는 어린아이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이 의미를 좀더 살펴보자.
1) 아내에게 주신 말씀 : 엡5:22-24은 앞에서 소개했고, 다른 본문을 살펴보겠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3:16),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3:18),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ㅈ게 하려 함이니"(벧전3:1) 이는 아내만 순종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21절에서 나타나듯이 주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서로 복종해야하기 때문이다. 복종하다로 번역된 희랍어와 라틴어는 "~아래 자기자신을 두다"는 뜻이다. 누군가를 순종하는 태도로 보조해 주는 것을 가리킨다. 아내는 남편을 보좌하고 복종해야 한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남자의 머리이시며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이심을 말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 아내는 자신이 하는 일이 남편에게 해를 끼치거나 무관심하게 되도록 한다면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남편이 하는 일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2) 남편에게 주신 말씀 : 남편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그 말은 아내를 위해 마땅히 희생을 각오해야한다는 말이다. 또한 이는 남편이 아내를 공개적으로 비평해서는 안된다는 말도 내포한다. 남편들은 아내에 대한 변호와 성장에 대한 책임이 있다.(벧전3:7) 또한 벧전에 등장하는 '동거'는 남편이 아내에게 모든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해야할 책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3) 부모와 자녀 : 부모는 자녀들을 훈계해야 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출20:12;잠6:20,21). 또한 훈육을 위해 때로는 매를 댈 수도 있다.(잠19:18;잠23:13;잠13:24;잠22:15)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연단되기 위해 고난이 필요하듯 자녀에게도 정당한 훈련은 필요하다.
4) 결혼을 준비하는 자 : 결혼의 표준들을 붙들고 이 표준들에 근거하여 상대방을 평가해야 한다. "그/그녀는 나에게 예수그리스도처럼 대해 줄 수 있을까? 나는 그/그녀를 위해서 나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5) 권태기에 있는 부부 :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그리스도께 식어버린 사랑에 다시 불을 붙여 주시고 죽어버린 사랑을 소생시키기도록 간구해야 한다.
묵상 : 사실 이 본문은 간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그리고 그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해야 한다는 것만을 가르친다. 그러나 간음이라는 말 자체가 결혼을 전제로 하고 있고, 그 다음 절에서 이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결혼에 대해 충분히 묵상할 필요가 있다. 나도 이제 결혼할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결혼에 대해 충분히 준비하고 있는가? 결혼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그 가치에 대해 충만히 배우고 나 자신이 그 가르침에 합당하도록 채찍질해야한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싶다.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 안에서 양육하는 아내, 나를 도우며 서로 사랑이 충만할 수 있는 자를 만나고 싶다. 또한 그것이 엘리 제사장처럼 나의 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이어지도록 말씀 안에서 가르치는 부모가 되고 싶다. 이를 더욱 간구하며 기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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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2절)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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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신자의 결합 관계는 영구적이다. 그러나 이를 예표하는 결혼은 안타깝게도 영구적이지 못하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물었던 이혼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자. 바리새인들은 신24:1-4을 근거로 이렇게 물었다. "남자가 어떤 이유로든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그에대해 예수님께서는 결혼함으로 한 몸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마19:4-7)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바리새인은 모세는 이혼증서를 줄 수 있다고 명하는지 반문한다. 예수님은 그에 대해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19:7-9)고 말씀하신다.
 이 본문은 결혼의 영구성을 말하고 있다. 아담에게 하와를 주신 것을 통해, 하님께서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 결혼을 제정하셨음을 알 수 있다.(창2:18,21-24) 또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으로 결합되는 것은 평생 유지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신다. 왜냐하면 결혼을 만드신 목적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이혼은 생각할 수 없으며 영구적인 결혼 생활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혼을 허용하신 것이 아니라, 타락 전에 주어진 표준들이 타락 이후에 인간이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혼을 '허용'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혼을 증오하시며 한번 결혼한 부부는 어떤 태도를 취하든 끝까지 부부임을 강조하신다.(말2:14-16)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핵심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결혼 전에 순결을 유지하고 결혼 후에 신뢰를 유지해야 한다.
 물론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이라는 말을 통해 결혼 첫날 밤에 여인에게 불결함이 발견되는 것이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신다. 비록 이혼의 권리는 가지나 하나님께서는 결혼 생활을 계속 하시기를 바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32절 말씀에서 보여주듯, 남자가 결혼한 후에 상대방이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한 경우 이혼이 허용되나(재혼도 허용되며 간음으로 여겨지지 않음,신24:1-4) 다른 어떤 사유도 이혼을 성립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이혼한다면 여자가 재혼하게 만들어 간음을 범한자로 만드는 죄를 짓는 것이다.
cf. 음란함과 간음은 동일한 말이 아니다. 간음은 결혼 후에 신뢰를 배반하는 것이다. 이단어는 결혼 계약을 파기하는 단어로 사용된다.(희랍어 moicheia를 번역한 라틴어) 그러나 음란함(희랍어에서는 pernemi, 팔다)은 더 넓은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모든 유형의 성적인 불결함을 가리킨다.
 이에 반해 바리새인들의 행동을 살펴보자. 신24:1,2절에서 수치되는 일이 발견되면 이혼 증서를 쓸 수 있다고 했다. 바리새인들은 '이혼 증서'는 정확히 계산하되, '수치되는 일'은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다. 저녁 식사 방해, 논쟁, 부모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 등을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해석했다.  '수치스러운 일'은 벌거벗은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로 성적인 불결(혼전관계, 간음 등)과 관련된 단어다. 여기서 간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간음이 입증될 경우 돌에 맞아 죽어야 했기에 구태여 이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은밀하게 마리아를 보내려고 한 것은, 당시 이혼 법을 이용해 마리아를 간음한 여인으로 만들지 않기 위함이었다. 간음한 여인은 돌로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배경을 비추어 볼 때, 이혼을 허용하는 경우는 음행한 경우 뿐이며, 그 외의 다른 어떤 경우에도(이 경우에 해당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따르고자 한다면), 상대방의 행위에 관계 없이 신실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표준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한다. 이 사랑은 상대편이 신뢰를 지키지 못했음에도 나타나는 사랑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를 위한 표준이다. 또한 이혼하고 기독교인이 된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들은 예수를 믿고 회개함으로 과거가 청산되었기에 처음으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결혼할 권리를 갖게 된다. 또한 불신자와 결혼했을 경우라도 배우자를 버려서는 안된다. 그 경우 믿는 자가 배우자를 구원하시는 도구로 쓰실줄 어떻게 아는가?(고전7:16) 그러나 믿지 않는 상대방이 이혼하고 싶어할 경우 이혼할 수는 있으나 그 여인을 내보낸 후에도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머물러야 한다. 또한 한가지 우리가 살필 것은 우리가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가지 악 중에 차악을 택하는 방편으로의 이혼을 선택할 수 있다. 술로 재산을 탕진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과 결혼한 믿는 아내의 경우, 자녀들을 키우고 교육하기 위해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를 수 있다. 그 때 어쩔 수 없이 어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차악으로 이혼을 택할 수도 있다. 또한 이혼과 재혼이 심각한 문제이지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표준을 낮추어서는 안되며 성경에 충실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표준에 이르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간음과 음란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배우자를 버리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호세아와 고멜을 살펴봄으로써 드러내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보이셨다. 방탕한 아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철저히 호세아를 배반했으나 호세아는 끝까지 받아들인다. 세 자녀의 이름은 이스라엘의 상황을 상징한다(이스라엘(흩어진),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함),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사태를 호전시키셔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자녀의 이름을 바꾸신다. 첫째는 여전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만 하나님께서 흩으신다는 의미가 아닌 하나님께서 심으신다는 의미로 바뀐다. 왜냐하면 고대 동방 지역에서는 무엇인가를 버릴 때 사용되던 동작과 같은 동작으로 씨를 땅에 심었기 때문이다. 로루하마는 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은), 로암미는 암미(그들이 내 백성이 될 것임이니라)로 바뀐다. 이 새로운 의미는 하나님의 불변하는 사랑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많은 죄를 덮어 주었는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의 사랑은 오류가 있는 상대방의 죄를 이처럼 덮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며 보여준다.
 호세아를 떠나 고멜이 다른 남자와 살 때, 새로 만난 애인은 항상 이전 애인보다 가난했다. 한 애인에게 호세아가 찾아가 그녀는 자신의 아내이며, 아직도 자신은 그녀를 사랑하기에 그녀를 돌보아 달라며 돈을 준다. 고멜은 아무것도 모른채 그 혜택을 누린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이는 무한하다. 그러나 고멜이 그러하듯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다가오는 그 사랑이 어디서 오는지 우리는 종종 알지 못한다. 그 신실하신 사랑으로 예수님께서 직접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죄악들을 스스로 짊어 지시고 조롱을 받으며 죽으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고멜은 마침내는 노예가 되었다. 벌거벗은 모습으로 노예단 위에 섰을 때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그 노예를 샀다. 가장 높은 가격으로 신청해서 고멜을 샀다. 고대 율법에 따르면 남자는 자기가 산 노예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다. 자신이 받은 치욕과 음행에 대해 처벌할 수 있었으나 호세아는 다시 아내의 신분으로 높였다.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이 이런 것이다. 그리고 그 뿐 아니라 "내가 그대를 위하여 여기 있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신실한지를 뼈저리게 보여준다.
 즉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이다. 우리는 고멜과 같은 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사랑으로 우리를 여전히 붙드신다.
묵상 : 결국 이혼을 통해 알리시는 것은 결혼이 영구적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끝없이 우리의 죄는 드러나며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은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 그러나 이것이 추상적인 표현에서 머물 때 우리는 그것을 깊이 깨닫지 못한다. 우리의 본성이 그정도로 더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로 하여금 그것을 보여주셨나보다. 비록 신명기에 음행한 여인과 합법적으로 이혼할 수 있다는 하셨음에도 버리지 않기를 바라신다는 하나님의 뜻을 보게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얼마나 더러운지를 뼈저리게 보여준다. 내가 고멜이라는 사실을 볼 때 내가 얼마나 더러운 자이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그 은혜를 누리기에 너무도 기쁘지만 동시에 아직도 그 더러움이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깨닫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기에 더욱 나 자신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변화되기를 바라며 주께서 더욱 그 길로 인도하시기를 바란다. 존 오웬이 그러했듯 죄에 몸서리치며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하는 자녀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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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7절)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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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예수님은 진실의 필요성과 진실 획득의 어려움에 대해 말씀하신다.
 13절부터 산상수훈은 율법을 해석하며 6가지 도덕적 실례에 대해 말한다. 분노를 극복하는 것, 성적인 순결을 유지하는 것, 결혼의 신실성을 유지하는 것, 진실, 욕심이 없는 태도, 사랑에 대해 말이다. 여기서는 그 중 4번째 도덕적 실례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맹세 자체를 금하시지 않았다.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보겠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신10:20),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가운데에 세움을 입으려니와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를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12:16,17) 바울도 종종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라 호소함으로써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롬1:9;고후1:23;빌1:8;살전2:5,10) 하나님도 맹세하고 계심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도 맹세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처럼 더 높은 권위에 호소하기 위해 맹세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선언의 진실성을 확신시키기 위해 취하신 거룩한 조치가 하나님의 맹세다.(히6:17-19)그 예로 아브라함에게 팔레스타인 땅이 그의 소유가 될 것이며, 영원토록 그의 후손에게 속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 가운데 체결하신 맹세를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며 "확실히 알라"고 말씀하셨다. 이토록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반신반의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토록 우리의 구원은 불완전한 나 자신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기에 확신과 안전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땅을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창9:9-11), 구원자를 보내시겠다는 약속(눅1:68,73), 그의 아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시겠다는 약속(시16:10;행2:27-31), 이스라엘을 보전하며 복 주시겠다는 약속(사49:15-18) 등 많은 약속을 맹세의 형식에 담아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맹세를 금하신 이유는, 그 당시 맹세가 크게 남용되어서 맹세가 진실을 드러내는 데에 기여하기보다는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즉, 맹세 그 자체를 반대하신 것이 아니라 맹세를 남용하여 진리를 가리게 되는 것을 경계하신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강조하듯, 하나님의 역사는 자연과 은총을 분리하여 은총만을 다스리는 분이 아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님으로 현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영역, 벗어날 수 없는 영역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며 삶의 모든 부분 속에 계신다. 따라서 진실은 상황과 시간에 상관 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은 우리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눅18:27)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을 조절하셔서 우리의 혀를 통제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좋지 못한 말을 조심하는 소극적 태도와 하나님의 영광을 도모하기 위해 혀를 사용하는 것을 동시에 요구해야만 한다.
묵상 :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본질적인 무능을 무시한 채 맹세를 악용하는 자를 경계하는 내용이다.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인격 앞에 이루어지기에 우리에게는 고도의 성실성과 진지함이 요구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경건과 신실함을 가능하는 척도로 맹세는 사용되었다.(시50:14;사19:21;렘44:25)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변질되어 자신의 신앙과 경건을 만인 앞에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했다. 사람 사이에 맺어진 맹세일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내재되어있다. 그런데 그러한 맹세를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얼마나 큰 죄인가! 그리고 이를 통해 가리워지는 하나님, 그 진리는 얼마나 악독한가! 결국 맹세의 오용은 나를 드러내기 위한 과시욕, 교만에서 나타난다. 즉 드러나는 죄는 내재된 죄의 표현이다. 드러나는 죄는 우리의 이성을 현혹시키기 쉽다. 이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나의 내재된 죄를 깨닫는 법 뿐이다. 이를 위해 더욱 하나님 앞에 낮아지며 나 자신을 버리자. 그러할 때 진리가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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