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6-22] 금식의 올바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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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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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금식은 죄를 슬퍼하고 회개하는 마음과 관련되어 있었다.(욜2:12;욘3:5) 히브리인들은 대속죄일만 되면 전국적으로 금식하며 죄를 슬퍼하고 화목을 갈망했다. 처음에는 이 날에만 금식을 시행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후에 국가적 재난, 슬픔이 찾아온 날에도 시행되었다.(삿20:26;삼상31;13;삼상7:6) 금식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나님 앞에서 영혼이 회개하는 태도로 겸손히 무릎 꿇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마9:14,15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고 답변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은 것은 금식이 슬픔을 의미하는 것임을 다시금 알려준다. 구약에서는 사58:1-7에서 금식에 관하여 가장 광범위하게 논의하고 있다. 의식으로서 금식은 의미가 없으며, 죄를 회개하고 변화된,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사는 것으로서의 금식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시행되던 금식의 진정한 의미였다.
예수님께서 오신 후에는 금식의 의미가 바뀌었다. 초대 교인들은 자신들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죄 때문에 금식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뚜렷한 이끄심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현세의 평범한 일상사에서 잠시 떠나려는 의도를 가지고 금식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보여 주시기를 간구하면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하나의 인격적인 훈련이었다.(고후6:4,5) ①고넬료는 금식하는 중에 베드로를 찾으라는 계시를 받아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달되기 시작했다.(행10:30-32) ②금식기도하는 도중에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도록 하셨고, 그 계시를 통해 바울의 평생에 걸친 로마에 있는 이방인들을 위한 전도 사역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금식의 참된 의미가 외형적인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한 절제에 있기에, 다른 무엇인가를 절제함으로써도 성취된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잠시 동안 세상 일을 멀리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은 틀림 없다.
묵상 : 나는 매일 묵상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매우 많은 시간을 요한다. 그 시간이면 다른 것에 투자를 더 많이 할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으면 마음 한켠이 항상 불편하다. 어쩌면 그것은 나의 금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변화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파묻히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그 세상에서 절제할 필요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 이를 위해 더욱 나의 삶을 절제하겠다. 물론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
[6:23-34] 세상 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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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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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전반부에서 기독교인의 영적인 생활에 관하여 중요한 교훈들을 주신 다음, 영적인 생활에서 실패하게 하는 요인들에대해 경고하는 내용을 소개한다. 6:19-7:5까지 예수님은 재산을을 사랑하는 것, 불안, 타인을 비판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신다.
성경에서도 돈을 사랑하다 망한 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아간, 솔로몬, 아나니아와 삽비라...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보다도 가정을 돌보고 재산을 늘리는 일에만 노력을 쏟는 경우가 많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는 바울의 고백은 과장된 말이 아니다.
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나 인류가 죄를 범했을 때 인류에게 유익하도록 창조된 것들이 오히려 해를 끼치는 것들로 탈바꿈했고, 이를 소유하기 위해 싸웠다.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 복종할 때 돈과 재물은 마음 중심에서 밀려나고 하나님이 마음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는 말은 아니다. 젊은 부자에게 예수님께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이유는, 그것이 그가 주를 따르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우리는 적절하게 사용하고 평가해야 한다. 재물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한다.
다시금 말하면 예수님은 돈 자체를 악한 것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재물에 집착하다 파멸에 이르는 태도를 문제삼으셨다. 그리고 한단계 더 나아가 그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①어느날엔가 땅 위의 재물은 영원히 없어지기 때문이다. ②또한 만일 인간의 보화가 땅 위에 있으면 그의 마음도 땅 위에 있게 되어 마침내 재물의 지배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③"네 눈이 성하면"(22절)에서 KJV는 single(단순한), RSV는 건실한(sound)로 번역했다. NSB는 롬12:8에서 liberality(관용)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도 이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단순한 눈(if your eyes are good)"은 "관대한 눈"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돈에 관대하라는 뜻이 된다.
24절에 나타나듯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실제 우리의 행동과 결정에서는 돈을 섬기고 있다면 하나님께 대한 얼마나 큰 모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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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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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염려해서는 안된다.
1) 24절에서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기에 돈을 사랑하는 것은 해롭다고 가르치셨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나 필요한 물품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다. 소요리 문답의 1번 항목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다음 격언은 사실이다. "만일 그대가 염려하고 있다면 그대는 믿지 않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믿음이 있다면 그대는 염려하지 않을 것이다." 케네디 S. 부에스트 : "하나님께서는 '단 한가지 일에 관하여조차도 염려하는 것을 영구적으로 중단하라'고 명령하신다. 우리가 염려하면 죄를 범하는 셈이다. 우리가 염려하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염려하면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돌보실 수 있고 돌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26-30절)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 가다가 파도를 보고 염려하고(마14:30), 예수께서 세금을 치르지 않을까 염려하며(마17:24), 누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인지라는 문제 때문에 걱정에 사로잡히며(요13:24), 예수님이 고난당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염려했던(마16:22) 베드로가, 예수님을 더욱 잘 알고 난 후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고 말한다.
3) 33절에서는 먼저 하나님의 관심을 중요시하고 그의 길을 따르면서 여러분이 특별하게 염려하지 않아도 물질적인 도움들이 찾아 오는지 기다려보라는 것이다.
이러한 약속은 오직 기독교인에게만 하셨다. 성도라면 우리는 마땅히 이 사실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최초의 구원 체험에만 머무르지 말고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에 관하여 계속 배워야 한다. 또한 우리에게 걱정이 엄습할 때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습관화 해야한다.
묵상 : 나는 늘 고민이 많다. 앞으로 진로는 어떻게 해야할지... 그러나 고민 자체가 염려는 아니다. 고민은 분명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찾기 위한 고민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염려는 말아야 한다. 나도 지금 고민하는 가운데 분명 염려가 있다. 이것을 하면 먹고 살 수 있을까?와 같은. 학부 때 한 교수님은 자신은 어디 가서든지 자신의 능력으로 먹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셨다. 그 자신이 너무 부러웠다. 물론 때때로 시련을 겪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항상 감당할 만한 시련만을 주시며 내가 쓰러지려 할 때 항상 붙들어 주시는 분임을 기억할 때 분명 염려를 놓을 수 있으나 아직 나는 연약하여 그 흔들림이 두렵다. 더욱 큰 믿음이 필요하기에 더욱 주님께 매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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