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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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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신자의 증거 사역을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열심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그것은 타인을 비판하려는 열심인데, 이는 같은 믿는 형제들을 날카롭고 부당하게 비평하는 것을 의미한다. "티"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톱밥 한 알갱이, 겨 한조각을 의미하며, "들보"는 거대한 서까래, 통나무를 뜻한다. 비판하는 자의 위선과 흉칙함을 얼마나 적나라하게 드러내는가!
물론 이 본문이 적절한 영적 분별력을 행사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니다. 바로 다음 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일을 다룰 때 바른 판단을 하라고 명령하셨다는 사실이 그 점을 뒷받침한다. 또한 교회가 치리권을 행사해서는 안된다거나 복음의 진리를 오류로부터 분별해내지 말라는 뜻도 아니다. 다만 우리 자신의 결함은 대충 뛰어 넘으면서 이웃의 허물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일반적인 인간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인이 잘못한 것에 대해 주님께 고백하고 용서받았는데 이를 감싸주지 않고 퍼뜨리는 자가 있다. 지인의 잘못이 티라면 퍼뜨리는 자의 잘못은 들보다.
오류를 범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판단을 대단히 신중하게 해야 한다. 이 말은 건전한 교리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판단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 조금 다르다고 하여 목사님을 비방하는 등의 일들은 옳지 않다. 반하우스 박사는 이런 질문을 제시했다. "비평을 할 때 죄를 깊이 슬퍼하는 마음에서 비평을 하는가? 하나님이 분노하실 만한 큰 죄를 범했다는 사실이 비평의 동기가 되고 있는가?" 종종 죄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긍정적인 동기 없이 비판하는데 이는 위선이며 질투, 이기심이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6:1) 여기서 "바로잡는다"고 번역된 헬라어는 원래 부러진 뼈를 접합시킨다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다. 오류가 있어 바로잡는 일은 매우 부드럽고 친절한 태도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우리는 사랑으로 가득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묵상 :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의 선행을 칭찬하기 보다는 좋지 못한 점을 캐내려 한다. 이는 그 사람의 잘못을 바르게 고쳐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냥 그 얘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지 않은지 돌아본다. 특히 나와 성질이 같지 않아 마찰이 생길 경우 나는 얼마나 거칠게 대응을 했는지 돌아본다. 나는 드라이를 방에서 한다거나 자기 자리를 정돈하지 않는 룸메이트가 있으면 얼마나 싫어하고 욕을 했는가! 내 주변 사람이 무슨 잘못을 할 때 나는 개념없다고 얼마나 투덜댔는가! 누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폐가 된다면 나의 본성은 그것을 참아내지를 못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랑이 충만해야하며 그 사랑으로 대할 때 부드럽게 대응할 수 밖에 없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풍성하심을 나도 누릴 수 있도록 더욱 나를 기도하며 갈고 닦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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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신자의 증거 사역을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열심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그것은 타인을 비판하려는 열심인데, 이는 같은 믿는 형제들을 날카롭고 부당하게 비평하는 것을 의미한다. "티"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톱밥 한 알갱이, 겨 한조각을 의미하며, "들보"는 거대한 서까래, 통나무를 뜻한다. 비판하는 자의 위선과 흉칙함을 얼마나 적나라하게 드러내는가!
물론 이 본문이 적절한 영적 분별력을 행사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니다. 바로 다음 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일을 다룰 때 바른 판단을 하라고 명령하셨다는 사실이 그 점을 뒷받침한다. 또한 교회가 치리권을 행사해서는 안된다거나 복음의 진리를 오류로부터 분별해내지 말라는 뜻도 아니다. 다만 우리 자신의 결함은 대충 뛰어 넘으면서 이웃의 허물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일반적인 인간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인이 잘못한 것에 대해 주님께 고백하고 용서받았는데 이를 감싸주지 않고 퍼뜨리는 자가 있다. 지인의 잘못이 티라면 퍼뜨리는 자의 잘못은 들보다.
오류를 범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판단을 대단히 신중하게 해야 한다. 이 말은 건전한 교리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판단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 조금 다르다고 하여 목사님을 비방하는 등의 일들은 옳지 않다. 반하우스 박사는 이런 질문을 제시했다. "비평을 할 때 죄를 깊이 슬퍼하는 마음에서 비평을 하는가? 하나님이 분노하실 만한 큰 죄를 범했다는 사실이 비평의 동기가 되고 있는가?" 종종 죄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긍정적인 동기 없이 비판하는데 이는 위선이며 질투, 이기심이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6:1) 여기서 "바로잡는다"고 번역된 헬라어는 원래 부러진 뼈를 접합시킨다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다. 오류가 있어 바로잡는 일은 매우 부드럽고 친절한 태도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우리는 사랑으로 가득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묵상 :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의 선행을 칭찬하기 보다는 좋지 못한 점을 캐내려 한다. 이는 그 사람의 잘못을 바르게 고쳐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냥 그 얘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지 않은지 돌아본다. 특히 나와 성질이 같지 않아 마찰이 생길 경우 나는 얼마나 거칠게 대응을 했는지 돌아본다. 나는 드라이를 방에서 한다거나 자기 자리를 정돈하지 않는 룸메이트가 있으면 얼마나 싫어하고 욕을 했는가! 내 주변 사람이 무슨 잘못을 할 때 나는 개념없다고 얼마나 투덜댔는가! 누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폐가 된다면 나의 본성은 그것을 참아내지를 못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랑이 충만해야하며 그 사랑으로 대할 때 부드럽게 대응할 수 밖에 없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풍성하심을 나도 누릴 수 있도록 더욱 나를 기도하며 갈고 닦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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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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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앞에서 언급한 관용과는 달리, 철저한 영적 분별에 관하여 얘기하고 있다. 이 본문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일부만 구원받는다는 것과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항상 하나님의 진리에 반대하는 자들이 있게 마련이며 기독교인은 그런 자들과 교류를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러한 분별은 산상수훈에서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마15:14에서도 그냥 두라고 말씀하시고, 사도 요한도 거짓 복음을 전하는 이를 집에 들이지도, 인사하지도 말라(요이1:10,11)고 말하며, 바울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저주를 받을 것이라(갈1:9) 말한다. 그를 회개시키라 말하지 않는다. 이는 복음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이해하는 태도와 치리하는 태도가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말씀은 성경에 있는 모든 진리가 불신자들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성경의 가르침은 성도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의 윤리를 받아들이기에 앞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야 한다. 이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녀는 예수가 야곱보다 큰 지, 예배할 장소는 어디여야 하는 지에 대한 문제에 대해 말하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메시아가 자신임을 말하고, 영적인 생수에 관해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한 신학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은 없다.
성도의 교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복음보다 사회적 지위에 더 많이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누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교제는 저주를 가져오는 모임이 된다. 어떤 사람이 유일한 복의 수여자이신 예수님과 참된 교제를 나누고 있지도 않으면서 성찬에 참여하여 특별한 권리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모습인가! 주의 만찬은 다만 기독교인들만을 위한 것이다. 불신자들은 교회의 교제에 들어올 수 없다.
복음을 듣고도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복음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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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1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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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영적 자녀들에게 은혜로 대하신다는 주님의 선언을 담고 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운 분이며, 가장 좋은 선물을 자녀에게 주고 싶어하는 분이기에 우리는 담대히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적용된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3:22) 여기서 기도가 항상 응답된다고 요한이 말한 이유는, 본문에 등장하는 '그'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들을 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기를 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신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해주신다는 점을 확신해도 된다.
또한 여기서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우리가 받지 못한다면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약4:2)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 주시기를 즐거워하시므로, 우리가 받지 못했다면 우리의 책임이다. 기도하지 않는 성도에게 신앙 생활 속의 승리는 없다. 마음의 정결함, 온유함... 산상수훈 앞부분에서 언급한 사항들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결여되어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예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복을 구해야할 뿐 아니라 계속 해서 간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희랍어에서 부정과거 명령형은 어떤 정해진 시점에서 어떤 특별한 일을 행하라는 명령이다. 또한 현재 명령형은 그 일을 한번만 하는데 그치지 말고 계속 행하라는 것이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명령은 현재명령형이다. 그러므로 반복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한밤중에 어느 집에 방문하여 음식을 달라고 끈질기게 매달리는 사람(눅11:5-10), 불의한 재판관으로부터 정의를 얻어낸 과부(눅18:1-8), 쉬지말고 기도하며(살전5:17) 기도하라고 권면하는 바울(롬15:30)을 보면, 기도와 인내의 훈련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성취할 때까지 끈기있게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며, 우리보다 먼저 일을 시작하신다. 이 일을 알고 우리는 기도를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성령의 사역들 가운데 하나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그 말에 반응하신다.(롬8:26,27) 또한 기도의 주도권을 쥐시고 우리의 마음을 살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 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빛 안에서 우리의 기도를 해석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돕기 원하신다.
묵상 : 앞에서도 묵상했으나 나는 기도를 잘하지 못한다. 현대인은 인간의 노력과 결정에 의헤 계획하고 성취한다고 생각한다고 A. 토레이는 말했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성적이고 성공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지혜가 필요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모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때 내게 기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다. 아버지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이 말씀을 더욱 붙들며 나아가자.
[7:12-20]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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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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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에서 발견되는 황금률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가장 보편적으로 칭송되어 온 선언일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다른 종교적인 교사, 철학자들의 가르침에도 충분히 드러나나 그들은 "너 자신에게 일어나기 원하지 않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는 소극적 원리를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적극적인 원리로 바꾸어 놓으신다.
소극적 의미의 황금률을 지키기는 쉬우나 적극적 황금률을 실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소극적 의미의 황금률은 자신의 이기적인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옛 자아가 출발점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적극적 황금률은 그가 자기 자신을 출발점으로 하는 한 그것을 지킬 수 없다. 예수님은 이 표현을 통하여 도덕성의 참된 본질을 개관하고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전성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황금률이 인간의 선함에 끼치고자 하는 주요한 효력은 인간의 선함을 정죄하는 것이다. 인간은 각자의 성품에 맞는 줄들을 긋는다. 그 때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서 곧은 자(rule)를 가지고 그 줄들이 비뚤어져 있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로움에 힘입어 하나님 앞으로 영접될 것이다.
산상수훈이 제시된 이유는 인간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함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을 항상 인도하시는 도덕성의 표준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이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가르치신 목적은 그것을 실천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시면 우리에게 새 생명이 창조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충족시켜 드릴 수 있는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이다.
『순전한 기독교』에 나오는 다음 글을 보자. "어렸을 때 나는 종종 치통을 앓은 일이 있다. 어머니에게 가서 통증을 호소하면 어머니는 내게 하룻밤 동안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약을 줄 것이고 나는 편하게 잠들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난 나는 어머니에게 가지 않았다. 나는 통증이 극심해지기 전까지는 어머니에게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분명히 아스피린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거기서 끝나지 않으신다. 어머니는 다음날 아침 나를 데리고 치과 의사에게 갈 것이다. 내가 더 얻지 않고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는데, 나는 더 얻기를 원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통증에서 즉각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러난 나는 나의 이빨을 근본적으로 고치지 않고는 나의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다. 나는 치과 의사들을 안다. 그들은 아직 통증이 시작되지조차 않은 다른 이빨들도 만지작거릴 것이다. 그들을 개를 품에 안고 잠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한 치를 주면 열 자를 달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 주님은 마치 치과의사들과도 같다. 그에게 한 치를 주면 열 자를 달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면밀히 계산해야' 한다. '실수를 범하지 말라. 나를 받아들이면 너를 완전하게 하리라. 네가 너 자신을 내 손에 맡기는 순간 너는 그 과정에 들어서는 것이다. 너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네가 원하면 나를 밀어 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를 밀어내지 않는다면, 내가 이 일을 수행하는 것을 양해하라... 나는 결코 쉬지 않을 것이다. 네가 문자 그대로 완전에 이를 때까지 너도 쉬어서는 안된다. 나의 아버지가 흔들림 없이 그가 나를 기뻐하는 것처럼 너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이것이 빌1:6의 요점이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깨끗한 거울처럼 하나님의 한량없는 영광, 능력, 사랑, 선하심을 반영하는 인물이 될 것이다. 그 과정을 때로 고통스러울 때도 있으나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묵상 : 끊임없이 말씀은 나의 의를 버리라고 말한다. 내가 하나님의 의로 나아가지 않으면, 예수 안에 있지 아니하면, 나의 모든 노력은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힘든 이유는 나의 자존심, 또는 하나님께서 나를 완전히 바꾸시는 과정 중에 필연적으로 겪게 될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무엇이든 치료하는 과정은 어렵다. 그러나 치료의 결과는 얼마나 감격적인가!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과 같이 사랑이 충만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결국 믿음과 율법은 모두 사랑에 기초한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더욱 주 안에 붙들리는 자가 되겠다. 주의 말씀에 더욱 순종하겠다. 그러나 내 본성이 이에 반하는 것을 알기에 더욱 주님 앞에 간구하으로 나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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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여기서부터 예수님은 많은 경고(4가지 경고)를 말씀하신다. 이는 청중들이 불신앙, 무감각, 속임수, 위선, 좌절 때문에 곁길로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는 도전을 주려는 의도로 산상수훈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중단하지 말라. 곁길로 가지 말라. 중단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면 언젠가는 문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영생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본문의 의미는 우리가 불신자의 입장에서 복음을 접했을 때 우리가 지금 따르고 있는 계속 따라가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구원을 잃지 않기 위해 기독교인 다운 삶을 계속 영위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해석이 된다면 신자의 영원하면서도 안전한 구원의 교리에 모순이 된다.
또한 이 말씀을 통해 나타난 진리는 구원은 오직 예수만을 믿음으로써 얻어진다는 것이다. 하늘에 이르는 길은 예수님만큼 좁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본성을 통해서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 하나님의 게시는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한데 대해서 인간을 정죄하고 있다. 본성을 통해서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단순히 경건한 생각이나 종교 안에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또한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말은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들어가도록 개인적인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결단은 항상 필요했다. 모세는 당시 사람들에게 결단을 촉구했고(신30:15,19), 여호수아도 그러했다(수24:15). 예레미야도(렘21:8), 베드로도(행2:38) 회개하도록 촉구했다. 우리의 마음 상태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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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두번째 방해에 대해 언급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날 것이며, 만일 그리스도를 떠나 그 같은 교사들에게로 돌이키면 그들은 틀림없이 진리와 구원의 근원으로부터 떠나도록 이끌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을 이리로 묘사하는 관습은 당대에 보편화된 관습이었다.(겔22:27;습3:3;행20:29,30) 여기서 예수님은 세상에 이리가 나타나리라는 사실 그 자체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 양으로 위장한 이리가 나타난다는 점이 위험하다고 말씀하신다.(본문;고후11:14,15)
선지자는 제삼자를 대신해서 이야기하는 자, 특히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야기하는 자를 뜻한다. 동족을 이끌고 이스라엘 땅으로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모세는 자신은 말주변이 없다고 말한다. 그 때 하나님은 그의 입을 대신해 줄 자, 아론을 택한다.(출4:14-16) 이 사건에서 아론에게 부여된 역할이 선지자의 역할이다.(출7:1) 이 개념에 근거할 때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야기하는 척 하면서 악마에게 속한 일들을 가르치는 자들을 경계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렘23:21,22)
그렇다면 어떻게 그릇된 가르침을 분별해 낼 수 있는가?
1) 거짓 선지자의 가르침에는 "좁은 문", "좁은 길"이 없다.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면 거짓 가르침이다.
2) 거짓 선지자들은 현실이 요구하더라도 경고성 교리를 말하지 않으며, 거짓 평화만을 전한다.(렘6:14,8:11) 청중들이 회개하도록 하는 요소가 없다.
3) 선행들을 시험해 보도록 권고한다. 참된 기독교인은 열매가 있어야 하며 그 열매는 영적인 열매로서 만족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7:21-29] 행함이 없는 신앙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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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3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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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방해로서 이번에는 마음에 잠복해 있는 위험으로 관점을 돌리셨다. 그것은 자기 기만, 착각이다. 복음을 듣는자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믿을 뿐 아니라 어떤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확신해야 한다.
이 말씀은 몇가지 교리를 믿고 있거나, 선행을 하면서도 그리스도께 진정한 헌신을 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순종과 제자도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자들을 향한 경고다.
1)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영적인 확신을 찾게 되는 첫번째 영역은 교리다. "주여 주여"는 분명한 신앙고백이다. 구약에서 "주"는 "여호와"를 지칭한다. 신약에서는 "Kurios"로 로마시민들이 가이사의 신성을 고백할 때 사용한 단어다. 예수님은 이 본문에서 예수의 신성을 고백하면서도 예수와 진정한 인격적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리라는 것을 알리고 계신다. 종교개혁 전 루터는 신학박사였다. 그러나 아직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였다. 머리로 교리를 믿으며 거듭나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마음을 주님 앞에 드러내 놓고 주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헌신의 마음을 주시도록 허용해야 한다.
2) 자기 기만의 두 번째 영역은 행위의 영역이다. 세례를 받고, 서품을 받고, 교회 봉사를 함에도 여전히 거듭나지 않을 수 있다. 인격적 관계는 행위에 선행해야 한다. 진정한 기독교는 믿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선행이라는 열매를 맺는 새로운 삶을 낳는다. 선행 홀로 우리를 이끌지 못한다.
예수께서 나의 개인적인 구주가 되기 위해 ①내가 하는 일을 중단하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존 스토트 목사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극적인 일이지만 주님의 음성에 귀를 틀어막고 주님의 끈질힌 호소를 묵살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때로는 우리의 양심의 찌름을 통하여, 때로는 마음을 깊이 탐사함으로써 그의 음성을 듣는다. 때로는 도덕적 패배를 통해서,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적인 주림을 통해서, 때로는 질병이나 고통이나 두려움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탄원을 듣는다. 우리는 친구나 설교자나 책을 통해서도 그의 음성을 듣는다. 우리는 듣되 주의깊게 들어야 한다." ②또한 우리는 주께서 하시는 말씀들이 참되며 주님 한분만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③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구원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지는 않다. 주께서는 이미 우리가 문을 열도록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문을 여는 행위는 반드시 필요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는 당신이 제 마음 속에 들어 오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를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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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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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이 본문에서 토대가 중요함을 역설하신다.
스스로의 힘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품을 형성하도록 애쓰는 것은 모래 위에 저택을 짓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 내 위에 세울 때에만 예수님이 말씀하는 성품을 형성시킬 수 있다. 예수가 토대이며 반석이시다. 현새와 내세에 영원토록 지속될 수 있는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반석이 되셔야 한다.
또한 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삶이 영구적인 삶이 됨을 가르친다. 누구나 환난을 만난다. 그 때 해결책은 확실한 토대 위에 세우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 만이 나의 토대가 되실 수 있음을 알면서, 그 토대 위에 아무런 가치 없는 것들, 구원받은 후 영원의 세계에서는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을 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굳건한 토대 위에 서 있겠다. 확신을 갖고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따뜻한 영접을 받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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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9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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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은 다른 모든 성경과 마찬가지로 산상수훈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산상수훈 설교자는 산상수훈 그 자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욱 친밀해질 수 있다. 산상수훈에는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내용도 많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를 통해 예수를 바라보며, 그 말씀을 뒷받침 하는 권위가 무엇인지를 돌이켜 봐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직관적인 확신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말과는 구별된다. 그리스도의 가장 놀라운 계시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예수님은 박해에 관해 말씀하시면서도 자신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박해를 받을 것이라 가르치셨다. 또한 자신을 권위있는 율법 해설자로 말씀하셨다.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오셨다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메시아임을 선언하셨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며 우리는 마땅히 그분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권위를 갖고 말씀하시며 행동하셨다.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 많은 이적을 행하셨다. 이런 행위들은 그의 가르침의 근원을 드러냄으로써 그에게 신뢰성을 더 크게 부여했다.(요3:2)
최종적이고 결론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의 보루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사건이다.
산상수훈이 주는 가장 중요한 소식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나사렛 예수의 인격이다. 그 사실을 믿고 나의 생애를 그분의 보호하심에 완전히 맡기자. 그 때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들을 나를 위해 행하실 것이다. 어두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만드시고, 성령을 통하여 성경을 해석해주시며,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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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앞에서 언급한 관용과는 달리, 철저한 영적 분별에 관하여 얘기하고 있다. 이 본문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일부만 구원받는다는 것과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항상 하나님의 진리에 반대하는 자들이 있게 마련이며 기독교인은 그런 자들과 교류를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러한 분별은 산상수훈에서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마15:14에서도 그냥 두라고 말씀하시고, 사도 요한도 거짓 복음을 전하는 이를 집에 들이지도, 인사하지도 말라(요이1:10,11)고 말하며, 바울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저주를 받을 것이라(갈1:9) 말한다. 그를 회개시키라 말하지 않는다. 이는 복음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이해하는 태도와 치리하는 태도가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말씀은 성경에 있는 모든 진리가 불신자들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성경의 가르침은 성도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의 윤리를 받아들이기에 앞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야 한다. 이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녀는 예수가 야곱보다 큰 지, 예배할 장소는 어디여야 하는 지에 대한 문제에 대해 말하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메시아가 자신임을 말하고, 영적인 생수에 관해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한 신학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은 없다.
성도의 교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복음보다 사회적 지위에 더 많이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누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교제는 저주를 가져오는 모임이 된다. 어떤 사람이 유일한 복의 수여자이신 예수님과 참된 교제를 나누고 있지도 않으면서 성찬에 참여하여 특별한 권리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모습인가! 주의 만찬은 다만 기독교인들만을 위한 것이다. 불신자들은 교회의 교제에 들어올 수 없다.
복음을 듣고도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복음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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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1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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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영적 자녀들에게 은혜로 대하신다는 주님의 선언을 담고 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운 분이며, 가장 좋은 선물을 자녀에게 주고 싶어하는 분이기에 우리는 담대히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적용된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3:22) 여기서 기도가 항상 응답된다고 요한이 말한 이유는, 본문에 등장하는 '그'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들을 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기를 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신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해주신다는 점을 확신해도 된다.
또한 여기서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우리가 받지 못한다면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약4:2)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 주시기를 즐거워하시므로, 우리가 받지 못했다면 우리의 책임이다. 기도하지 않는 성도에게 신앙 생활 속의 승리는 없다. 마음의 정결함, 온유함... 산상수훈 앞부분에서 언급한 사항들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결여되어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예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복을 구해야할 뿐 아니라 계속 해서 간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희랍어에서 부정과거 명령형은 어떤 정해진 시점에서 어떤 특별한 일을 행하라는 명령이다. 또한 현재 명령형은 그 일을 한번만 하는데 그치지 말고 계속 행하라는 것이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명령은 현재명령형이다. 그러므로 반복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한밤중에 어느 집에 방문하여 음식을 달라고 끈질기게 매달리는 사람(눅11:5-10), 불의한 재판관으로부터 정의를 얻어낸 과부(눅18:1-8), 쉬지말고 기도하며(살전5:17) 기도하라고 권면하는 바울(롬15:30)을 보면, 기도와 인내의 훈련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성취할 때까지 끈기있게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며, 우리보다 먼저 일을 시작하신다. 이 일을 알고 우리는 기도를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성령의 사역들 가운데 하나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그 말에 반응하신다.(롬8:26,27) 또한 기도의 주도권을 쥐시고 우리의 마음을 살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 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빛 안에서 우리의 기도를 해석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돕기 원하신다.
묵상 : 앞에서도 묵상했으나 나는 기도를 잘하지 못한다. 현대인은 인간의 노력과 결정에 의헤 계획하고 성취한다고 생각한다고 A. 토레이는 말했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성적이고 성공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지혜가 필요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모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때 내게 기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다. 아버지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이 말씀을 더욱 붙들며 나아가자.
[7:12-20]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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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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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에서 발견되는 황금률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가장 보편적으로 칭송되어 온 선언일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다른 종교적인 교사, 철학자들의 가르침에도 충분히 드러나나 그들은 "너 자신에게 일어나기 원하지 않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는 소극적 원리를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적극적인 원리로 바꾸어 놓으신다.
소극적 의미의 황금률을 지키기는 쉬우나 적극적 황금률을 실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소극적 의미의 황금률은 자신의 이기적인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옛 자아가 출발점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적극적 황금률은 그가 자기 자신을 출발점으로 하는 한 그것을 지킬 수 없다. 예수님은 이 표현을 통하여 도덕성의 참된 본질을 개관하고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전성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황금률이 인간의 선함에 끼치고자 하는 주요한 효력은 인간의 선함을 정죄하는 것이다. 인간은 각자의 성품에 맞는 줄들을 긋는다. 그 때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서 곧은 자(rule)를 가지고 그 줄들이 비뚤어져 있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로움에 힘입어 하나님 앞으로 영접될 것이다.
산상수훈이 제시된 이유는 인간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함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을 항상 인도하시는 도덕성의 표준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이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가르치신 목적은 그것을 실천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시면 우리에게 새 생명이 창조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충족시켜 드릴 수 있는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이다.
『순전한 기독교』에 나오는 다음 글을 보자. "어렸을 때 나는 종종 치통을 앓은 일이 있다. 어머니에게 가서 통증을 호소하면 어머니는 내게 하룻밤 동안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약을 줄 것이고 나는 편하게 잠들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난 나는 어머니에게 가지 않았다. 나는 통증이 극심해지기 전까지는 어머니에게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분명히 아스피린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거기서 끝나지 않으신다. 어머니는 다음날 아침 나를 데리고 치과 의사에게 갈 것이다. 내가 더 얻지 않고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는데, 나는 더 얻기를 원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통증에서 즉각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러난 나는 나의 이빨을 근본적으로 고치지 않고는 나의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다. 나는 치과 의사들을 안다. 그들은 아직 통증이 시작되지조차 않은 다른 이빨들도 만지작거릴 것이다. 그들을 개를 품에 안고 잠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한 치를 주면 열 자를 달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 주님은 마치 치과의사들과도 같다. 그에게 한 치를 주면 열 자를 달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면밀히 계산해야' 한다. '실수를 범하지 말라. 나를 받아들이면 너를 완전하게 하리라. 네가 너 자신을 내 손에 맡기는 순간 너는 그 과정에 들어서는 것이다. 너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네가 원하면 나를 밀어 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를 밀어내지 않는다면, 내가 이 일을 수행하는 것을 양해하라... 나는 결코 쉬지 않을 것이다. 네가 문자 그대로 완전에 이를 때까지 너도 쉬어서는 안된다. 나의 아버지가 흔들림 없이 그가 나를 기뻐하는 것처럼 너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이것이 빌1:6의 요점이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깨끗한 거울처럼 하나님의 한량없는 영광, 능력, 사랑, 선하심을 반영하는 인물이 될 것이다. 그 과정을 때로 고통스러울 때도 있으나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묵상 : 끊임없이 말씀은 나의 의를 버리라고 말한다. 내가 하나님의 의로 나아가지 않으면, 예수 안에 있지 아니하면, 나의 모든 노력은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힘든 이유는 나의 자존심, 또는 하나님께서 나를 완전히 바꾸시는 과정 중에 필연적으로 겪게 될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무엇이든 치료하는 과정은 어렵다. 그러나 치료의 결과는 얼마나 감격적인가!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과 같이 사랑이 충만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결국 믿음과 율법은 모두 사랑에 기초한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더욱 주 안에 붙들리는 자가 되겠다. 주의 말씀에 더욱 순종하겠다. 그러나 내 본성이 이에 반하는 것을 알기에 더욱 주님 앞에 간구하으로 나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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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여기서부터 예수님은 많은 경고(4가지 경고)를 말씀하신다. 이는 청중들이 불신앙, 무감각, 속임수, 위선, 좌절 때문에 곁길로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는 도전을 주려는 의도로 산상수훈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중단하지 말라. 곁길로 가지 말라. 중단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면 언젠가는 문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영생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본문의 의미는 우리가 불신자의 입장에서 복음을 접했을 때 우리가 지금 따르고 있는 계속 따라가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구원을 잃지 않기 위해 기독교인 다운 삶을 계속 영위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해석이 된다면 신자의 영원하면서도 안전한 구원의 교리에 모순이 된다.
또한 이 말씀을 통해 나타난 진리는 구원은 오직 예수만을 믿음으로써 얻어진다는 것이다. 하늘에 이르는 길은 예수님만큼 좁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본성을 통해서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 하나님의 게시는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한데 대해서 인간을 정죄하고 있다. 본성을 통해서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단순히 경건한 생각이나 종교 안에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또한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말은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들어가도록 개인적인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결단은 항상 필요했다. 모세는 당시 사람들에게 결단을 촉구했고(신30:15,19), 여호수아도 그러했다(수24:15). 예레미야도(렘21:8), 베드로도(행2:38) 회개하도록 촉구했다. 우리의 마음 상태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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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두번째 방해에 대해 언급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날 것이며, 만일 그리스도를 떠나 그 같은 교사들에게로 돌이키면 그들은 틀림없이 진리와 구원의 근원으로부터 떠나도록 이끌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을 이리로 묘사하는 관습은 당대에 보편화된 관습이었다.(겔22:27;습3:3;행20:29,30) 여기서 예수님은 세상에 이리가 나타나리라는 사실 그 자체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 양으로 위장한 이리가 나타난다는 점이 위험하다고 말씀하신다.(본문;고후11:14,15)
선지자는 제삼자를 대신해서 이야기하는 자, 특히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야기하는 자를 뜻한다. 동족을 이끌고 이스라엘 땅으로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모세는 자신은 말주변이 없다고 말한다. 그 때 하나님은 그의 입을 대신해 줄 자, 아론을 택한다.(출4:14-16) 이 사건에서 아론에게 부여된 역할이 선지자의 역할이다.(출7:1) 이 개념에 근거할 때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야기하는 척 하면서 악마에게 속한 일들을 가르치는 자들을 경계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렘23:21,22)
그렇다면 어떻게 그릇된 가르침을 분별해 낼 수 있는가?
1) 거짓 선지자의 가르침에는 "좁은 문", "좁은 길"이 없다.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면 거짓 가르침이다.
2) 거짓 선지자들은 현실이 요구하더라도 경고성 교리를 말하지 않으며, 거짓 평화만을 전한다.(렘6:14,8:11) 청중들이 회개하도록 하는 요소가 없다.
3) 선행들을 시험해 보도록 권고한다. 참된 기독교인은 열매가 있어야 하며 그 열매는 영적인 열매로서 만족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7:21-29] 행함이 없는 신앙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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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3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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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방해로서 이번에는 마음에 잠복해 있는 위험으로 관점을 돌리셨다. 그것은 자기 기만, 착각이다. 복음을 듣는자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믿을 뿐 아니라 어떤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확신해야 한다.
이 말씀은 몇가지 교리를 믿고 있거나, 선행을 하면서도 그리스도께 진정한 헌신을 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순종과 제자도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자들을 향한 경고다.
1)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영적인 확신을 찾게 되는 첫번째 영역은 교리다. "주여 주여"는 분명한 신앙고백이다. 구약에서 "주"는 "여호와"를 지칭한다. 신약에서는 "Kurios"로 로마시민들이 가이사의 신성을 고백할 때 사용한 단어다. 예수님은 이 본문에서 예수의 신성을 고백하면서도 예수와 진정한 인격적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리라는 것을 알리고 계신다. 종교개혁 전 루터는 신학박사였다. 그러나 아직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였다. 머리로 교리를 믿으며 거듭나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마음을 주님 앞에 드러내 놓고 주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헌신의 마음을 주시도록 허용해야 한다.
2) 자기 기만의 두 번째 영역은 행위의 영역이다. 세례를 받고, 서품을 받고, 교회 봉사를 함에도 여전히 거듭나지 않을 수 있다. 인격적 관계는 행위에 선행해야 한다. 진정한 기독교는 믿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선행이라는 열매를 맺는 새로운 삶을 낳는다. 선행 홀로 우리를 이끌지 못한다.
예수께서 나의 개인적인 구주가 되기 위해 ①내가 하는 일을 중단하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존 스토트 목사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극적인 일이지만 주님의 음성에 귀를 틀어막고 주님의 끈질힌 호소를 묵살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때로는 우리의 양심의 찌름을 통하여, 때로는 마음을 깊이 탐사함으로써 그의 음성을 듣는다. 때로는 도덕적 패배를 통해서,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적인 주림을 통해서, 때로는 질병이나 고통이나 두려움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탄원을 듣는다. 우리는 친구나 설교자나 책을 통해서도 그의 음성을 듣는다. 우리는 듣되 주의깊게 들어야 한다." ②또한 우리는 주께서 하시는 말씀들이 참되며 주님 한분만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③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구원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지는 않다. 주께서는 이미 우리가 문을 열도록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문을 여는 행위는 반드시 필요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는 당신이 제 마음 속에 들어 오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를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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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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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이 본문에서 토대가 중요함을 역설하신다.
스스로의 힘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품을 형성하도록 애쓰는 것은 모래 위에 저택을 짓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 내 위에 세울 때에만 예수님이 말씀하는 성품을 형성시킬 수 있다. 예수가 토대이며 반석이시다. 현새와 내세에 영원토록 지속될 수 있는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반석이 되셔야 한다.
또한 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삶이 영구적인 삶이 됨을 가르친다. 누구나 환난을 만난다. 그 때 해결책은 확실한 토대 위에 세우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 만이 나의 토대가 되실 수 있음을 알면서, 그 토대 위에 아무런 가치 없는 것들, 구원받은 후 영원의 세계에서는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을 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굳건한 토대 위에 서 있겠다. 확신을 갖고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따뜻한 영접을 받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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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9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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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은 다른 모든 성경과 마찬가지로 산상수훈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산상수훈 설교자는 산상수훈 그 자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욱 친밀해질 수 있다. 산상수훈에는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내용도 많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를 통해 예수를 바라보며, 그 말씀을 뒷받침 하는 권위가 무엇인지를 돌이켜 봐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직관적인 확신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말과는 구별된다. 그리스도의 가장 놀라운 계시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예수님은 박해에 관해 말씀하시면서도 자신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박해를 받을 것이라 가르치셨다. 또한 자신을 권위있는 율법 해설자로 말씀하셨다.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오셨다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메시아임을 선언하셨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며 우리는 마땅히 그분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권위를 갖고 말씀하시며 행동하셨다.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 많은 이적을 행하셨다. 이런 행위들은 그의 가르침의 근원을 드러냄으로써 그에게 신뢰성을 더 크게 부여했다.(요3:2)
최종적이고 결론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의 보루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사건이다.
산상수훈이 주는 가장 중요한 소식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나사렛 예수의 인격이다. 그 사실을 믿고 나의 생애를 그분의 보호하심에 완전히 맡기자. 그 때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들을 나를 위해 행하실 것이다. 어두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만드시고, 성령을 통하여 성경을 해석해주시며,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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