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1]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은 병을 고쳐준 자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신 분이다. 그런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는 공개적으로 행차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 위에 죽을 때가 가까워 왔음을 느끼고 계셨다. 이제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일 밖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더 이상 지난날과 같이 은밀하게 행하시지 않았다. 이 세상의 대속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모든 사람이 그 희생 제물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완전한 지식을 가지신 분임을 또한 말한다. 2절에서 주님이 타게 될 나귀를 제자들이 발견할 것임을 말씀하셨다. 또한 나귀 주인의 질문에 대한 답변까지 말씀하신다. 이 모든 일은 정확히 일어난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우리는 어디에도 숨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거룩으로 더욱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말씀이 구약의 예언의 성취라는 점에 또한 주목하자.
그(유다.9절)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창49:11)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사62:11)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야곱은 자식들에게 축복한 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이방 왕의 압제하에 있을 때에 메시아를 예언한 스가랴의 모습은 또한 어떠한가! 그 뿐 아니라 메시아를 예언할 때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신다는 말씀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바가 아닌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메시아가 기록대로 오셨으나 그들의 마음은 가리어져 있었기에 이를 깨닫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그들과 같은 자일 것이다. 말씀을 읽으며 우리는 그 말씀에 대해 믿어야 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히11:1)
또한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 얼마나 간사한 것인지 보게 된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찬송한 이들은 이스라엘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도 이스라엘이다. 그 사이의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우리의 본성은 이리도 간악하다. 우리의 신앙은 그러하기에 감정에 기반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그저 감정에 북받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 전 인격이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21:12-22] 성전을 청결케 하신 주님
먼저 예수님은 성전을 방문하신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유대 성전의 모습을 보게 된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다. 성전을 잘못 사용한 것에 대해 예수님은 개혁을 시행하셨다. 중세 때 교회 내에서 성경적이지 않은 교리들이 횡행하고 면죄부를 판매할 때 루터는 개혁을 감행했다. 교회 개혁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보다 소극적으로 살펴본다면 우리에게 있어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며 경건히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마지막 날에 영광스러운 성전에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재물과 같을 것이다"(말3:1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시8:2)
예수님은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쫓으시고, 맹인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셨고, 어린 아이들은 "호산나(시118:25,지금 구원해주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칠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를 보고 노하여 예수께 말한다. 그 때 예수님은 위 말씀을 하신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영적인 눈은 감겨있었다. 우리는 눈이 뜨여 있어야 할 것이다. 참 진리를 보아야만 할 것이다.
두 번째 사건으로는 무화과 나무에 대한 주님의 저주가 나타난다.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적의 유대교를 보여준다. 그들은 수없는 제사와 절기를 지켰으나 믿음, 사랑, 참된 거룩과 같은 참된 열매가 없었다. 이 무화과나무는 저주를 받아 말라 시들어졌다. 우리에게는 참된 열매가 필요하다.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참된 회개가 필요하다. 참된 성령의 열매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더욱 간구해야 한다.
[21:23-27] 예수님의 권세
하나님의 종들이 교회의 부패를 막기 위해 저지할 때 종종 비난이 따른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하느냐(23절)고 비난을 하게 된다. 예수님은 그 권세를 충분히 보이실 수 있으나 그러지 않았다. 예수님의 행적은 우리의 삶에 모범이 된다. 우리가 비난을 당할 때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자격을 따지기 위해 싸우는 것을 원치 않으신 것 같다. 내가 잘났네, 네가 잘났네 가타부타하며 내 속에 있는 죄성이 다시금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인가보다. 물론 때로는 맞서 싸워야 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예수님이 개혁을 감행하신 것 바로 뒤에 나와 그 중도를 말씀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그저 나를 비방할 뿐인 것이라면 참을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참는 것에 그치지 않으셨다. 그의 적들에게 요한의 세례는 하늘로 부터 온 것인지, 사람으로부터 온 것인지 물으셨다. 이를 물으신 까닭은 만약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면 예수를 증거한 요한을 인정하게 되어,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한다면 백성들이 그들이 거짓말 한다고 비방할 것이기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엇을 정확히 답할 수 없었다. 우리는 지나친 분쟁은 회피하되, 지혜롭게 해결해야 한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선한 일에 대해 변호하실 때 보여주신 지혜를 우리도 배워야 하며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데 네가 그와 같을까 하노라"(잠26:4)
이 말씀은 내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세례 요한의 말씀과 그의 행적을 돌아볼 때 그는 선지자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가 예수님이고, 성경에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잘 알고 있기에 예수님에 대해서도 당대 유대 지도자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자연인은 하나님을 알고 있더라도 그분을 알고 싶지 않아 눈가리고 아웅하는 자다.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직시해야함을 깨닫는다.
[21:28-46] 포도원 농부의 아들 비유, 불의한 농부의 비유
앞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한가지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을 때 가겠다고 말하지만 가지 않은 첫째 아들과 가지 않겠다고 하나 후에 뉘우치고 간 둘째 아들에 관한 비유다. 여태까지처럼 비유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비유의 참된 의미를 말씀하시어 그들을 질책하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을 얼마든지 용서하신다는 말씀을 가르치신다. 참된 회개에는 변화가 뒤따른다. 물론 십자가상의 죄수처럼 그 변화가 삶을 통해 보여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남아있다면 우리의 삶의 변화와 순종을 통해 이를 드러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껍데기만 기독인인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사람이 변하는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
다시금 비유로 말씀하신다. 이 비유에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너히라고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으나 그들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줄 깨달았다. 자연인이라 할지라도 양심은 있다. 그러나 그 양심의 가책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성도와 자연인의 차이다. 성도는 그 양심의 가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돌이킨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무리가 무서워 예수님을 잡지 못할 뿐, 그 양심의 가책의 제공자를 죽이려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특별히 선택하셨다. 이는 큰 은혜다.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율법과 계약과 말씀을 주셨다. 주님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민족이었다.(사5:7)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그런 특권을 누릴만한 조건이 없을 때에 택하셨을 때 그들은 감사함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해야 했다. 그런데 그 권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교만해졌으며 더욱 완악해졌다. 더 나아가 그들은 반역을 꾀했다. 우리는 우리가 피조물임을 항상 기억하며 그분 앞에 경외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와 같은 일은 그 당시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소아시아에 지어진 수많은 교회들을 보자. 그 교회들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터키)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지만 그들은 세속의 가치에 빠져 그리스도를 버린 국가가 되었다. 이것은 조국 교회에도 교훈을 준다. 또한 우리 개인에게도 교훈을 준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엥 순종해야 한다.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며 설교에서 찔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양심에 찔리는 것에 족하지 말고 우리는 회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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