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4] 혼인잔치의 비유
올스 하우젠 : "비유라는 것은 많은 각이 진 보석과 같아서, 여러 방향으로 광택을 내기 위해 여러 면으로 자를 수 있다."
복음은 우리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한다. 임금이 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유한 것은 그러므로 타당하다. 그러나 그 초청의 범위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우리 모두에게 손을 내밀고 초청하신다. 그런데 그 초청을 거절할 뿐 아니라 모욕을 하는 자들은 우리 인간이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내가 십계명을 온전히 지키지 못함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초대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초대에 응했으나 예복을 입지 않은채 거짓으로 신앙고백하는 이들은 심판 날에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어야 한다.
14절에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말씀하신다. 문맥상으로 볼 때 여기서의 택함은 예정을 뜻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굳이 "택함을 입은 자"라는 표현을 쓴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또한 암시하는 듯 하다. "For many are called, but few are chosen."(NASB) 여기서 우리는 오묘한 진리를 보게 된다. 모든 이에게 일반 은총으로 우리를 부르셨으나, 그 가운데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고, 주님을 응답하는 자들은 소수다. 그들은 그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그 초대에 응답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응답은 우리의 본성으로는 결코 불가능하기에 하나님께서는 택하시고 그들을 성실히 부르심으로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밖에 없도록 이끄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선택한 자만이 영생을 얻는다. 또한 그 부르심에 결국은 내가 믿음으로 응해야 하기에 내 편에서 볼 때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이토록 선택과 믿음은 결국은 같은 하나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준비하신 이가 하나님이며, 계속 설득하신 이도 하나님이다. 그에 대해 나는 그저 OK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기서는 그 복음의 부르심을 혼인 잔치를 통해 보여준다. 심판의 날을 바라보고, 우리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특권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초대에 응해야 한다. 더이상 대적하지 말고 복음을 따르자.
[22:15-22] 바리새인들의 질문
바리새인들이 질문한 목적은 예수님이 말의 올무에 걸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혜가 충만하실 뿐더러 지혜 그 자체시다. 불완전한 지성을 갖출 수 밖에 없는 우리가 어찌 예수님을 시험하겠는가? 예수님을 시험한 자는 마귀였다.(4장) 예수님을 시험함으로써 마귀의 수하인이 되지 않도록 하자. 결국 예수님을 시험해봤자 실패할 수 밖에 없으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우리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지혜의 풍성하심이다.
마귀와 적그리스도는 굉장히 지혜롭다. 우리는 그러므로 예수님의 풍성하신 지혜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그들과 싸워 이길 수 없다. 선생님, 참되신 분, 참으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는 분,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느 분... 수많은 아첨으로 말을 시작한다. 우리의 신앙 고백이 말뿐이면 아무런 효력이 없음을 이 말씀을 통해 충분히 알린다. 그리고 이를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때로 세상에서 잘나가서 하나님을 잊을 수 있다. 솔로몬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조국교회도 어려운 시기보다 지금 더 침체 상황에 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항상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있어야만 한다.
세상은 지혜롭지만 하나님은 더욱 지혜로우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해야 한다. 그들은 세금 문제를 통해 이스라엘의 명예와 로마에 속해있는 현실 문제로 시험했다. 그 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세상의 정부를 무시할 수 없다. 이를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정부도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도 따라야 한다.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지만, 그것에 반하지 않는 부분에 있어서는 세상의 규칙도 지켜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다. 우리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확립해야한다. 주중에서는 세상의 규칙대로만 살다가 주말에 교회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표리부동한 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살지만 세상의 규칙도 따르는 지혜 말이다. 이러한 자세는 기도와 교회에서의 함께함을 통해 배워나갈 수 있다. 또한 그만큼 세상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성도의 책임임을 우리는 기억하자.
[22:23-33] 사두개인들의 질문
다음으로 사두개인은 "부활" 문제로 예수님께 묻는다. 사두개인의 질문의 목적도 앞의 바리새인과 동일하게 예수님이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자신들이 내세우는 근거를 예수님께 물어 논리적 모순에 빠뜨리게 하고자 했다. 그것은 어떤 여자가 칠형제와 잇달아 결혼하였을 때, 그들이 죽고난 후 내세에서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문제였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지성은 부족하여 모든 공론에 대해 논리적으로 답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영역에 있어서 수많은 증거들을 발견했고 이를 논리적으로, 영적으로 깨달았기에 그 말씀하신 이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나는 지성적인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는 하나님이시기에 이에 대해 알리실 수 있었지만 말이다.
예수님은 부활 논쟁에 대한 답변으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3:6)는 말씀으로 얘기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의 무오설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모든 부분을 유심히 봐야한다. 여기서는 시제가 중요하다. "이니라"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므로 그들은 이 세상에서는 죽었으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활하여 살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부활은 믿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 부활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셨다. 우리는 그것을 본다. 그러므로 믿어야 한다.
앞의 내용이 논리적으로 부활을 더욱 직접적으로 증명하기에 먼저 얘기를 했지만 사두개인의 질문에도 물론 답하신다. 사두개인은 부활 상태의 본질을 전적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보이신다. 예수님은 내세에서 갖는 육체는 우리가 가진 것과 다른 차원의 것임을 가르치신다. 우리는 배고픔과 고통을 겪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살 것이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을 것이다. 우리는 그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약속을 우리는 마땅히 믿어야한다. 그리고 그 삶에 참여할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또한 우리는 사두개인의 완악함을 볼 뿐 아니라 부활이 무엇인가도 알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또한 유익이 되도록 하나님은 섭리하시고 역사하신다. 우리는 그러므로 그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마땅히 배워야 한다.
[22:34-46] 큰 계명과 그리스도의 질문
사두개인이 답변을 하지 못하자 다시 바리새인이 질문한다.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님은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신다. 십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다.(고전13:13) 이 말씀은 이 세가지를 비교하기 위함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은 사랑에 기반함을 가르치기 위함이셨다. 우리의 기반은 사랑이다. 즉 이 모든 것이 인격적인 관계 속에 형성된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너무도 많은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내 편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이루시는 것이므로,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며, 우리가 그에 대해 순종함으로 얻어지는 것임을 배운다. 우리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죄로 가득하여 미워함으로 가득차있어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딛3:3) 우리는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그 두려움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더욱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차원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그를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였음이라"(요일4:19)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열매가 자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날 것이다. 외적인 것에 집중하지 말고 우리는 내면에 집중해야 한다. 그 때 그 내면은 외면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이 답을 하신 후 바리새인에게 역으로 물으신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다윗은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시110:1)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성경에 능통한 자들이므로 이 구절을 모를리 없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이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 안에 서로 다른 두 위격이 있음을 보게 된다. 시편에 등장하는 "내 주"는 아버지 오른 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이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으로 나의 신앙을 점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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