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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14일 토요일

마태복음 26장

[26:1-13] 주께 기름을 부은 여인
 이제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 사역에 접어든다. 26장을 기점으로 앞에서는 주님의 말씀과 행적, 예언자이신 예수님을 보았다면, 이후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보게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를 분명 예언하셨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2절) 같은 내용을 4개의 복음서에서 함께 기록한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사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이며 우리가 그분을 통해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될 수 있는 근거다.
 25장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 끝날의 권세, 영광스러운 재림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기서는 갑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위대한 영광을 지니신 분이다. 그런 그 예수님이 미천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죽으신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대조되며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게 한다.
 그리고 이후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한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었다. 예수님께 대한 경외와 사랑에 근거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를 예수님의 제자들은 "허비"라고 비난한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헌신을 얼마나 기뻐하시는 지를 깨닫게 된다. 또한 우리는 제자들처럼 타인에게 비난하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함을 배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을 사랑한 여인에게 말씀에 기록되는 영예를 주셨다. 믿는 자에게는 영광이 있다. 이 세상의 헛된 것에 의지하지 말고 더욱 말씀에 의지해야할 것이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26:14-25] 가룟 유다의 반역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다. 이는 우리에게 몇가지 주의할 점을 깨닫게 한다.
 예수님을 입술로만 고백하고 따르는 삶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제자로 동행하며 주님의 표적을 보고 말씀을 들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대단한 종교적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그는 결국 회심하지 않았다. 우리의 주변 상황이, 말 번지르르한 신앙고백이, 내가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서있는가를 규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돈을 너무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돈 뿐이 아니다. 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살아갈 뿐이다. 나그네로서 떠나야만 하는데 평생 정착할 수 있을것이라 착각할 때 비극이 찾아온다. 우리가 쌓은 돈은 내 영생에 아무런 유익이 없다. 돈에 대한 지나친 사랑, 우상화를 경계해야 한다.
 불신자의 최후는 너무도 끔찍하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그를 가리켜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좋았을 뻔했다고 말씀하신다. 불순종의 결과는 영원한 파멸 뿐이다. 그곳에는 영원한 고통과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다.(막9:44)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부터 알고 계셨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슥11:12)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이 말씀을 우리에게 알리셨다. 그 무엇보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가룟유다의 마음을 그 전에 모를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받아들이신 까닭은 그 모든 것이 결국 십자가를 통한 대속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이 비록 힘들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계획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성도라면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주께서는 미리 계획을 해놓으셨다. 이런 주님의 계획을 믿고 바라보며 걸어가자.

[26:26-35] 최후의 만찬
 성찬식을 거행하신다. 이 때 예수님은 "이것은 내 몸이니라"(26절),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8절)이라 말씀하신 것을 바탕으로 가톨릭은 화채설(미사에서 사제가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어 이를 먹을 때, 우리 몸 안에서 이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논리다.
 Law 감독은 히브리어에서 '의미하다', 뜻하다'라는 의미의 단어가 없음을 말했다. 여기서 그리스어는 히브리어나 고대 시리아어의 관용 표현을 그대로 취하고 있어서 '그것은 ~이다'라는 표현은 '그것은 의미한다'로 사용된다. 비슷한 용례를 몇가지 찾자면 "세가지는 사흘이다"(창40:12), "일곱 좋은 이삭도 칠년이다"(창41:26), 그 열 뿔은 열 왕이요"(단7:24), "밭은 세상이요"(마8:38),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1:20)을 들 수 있다.
 또한 이를 기독론적 관점에서 살펴보더라도 말이 안된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고, 그 육체는 한 번에 여러 곳에 있을 수 없다. 예수님과 함께 앉아있었던 제자들이 그 떡과 포도주를 마신 것으로 보아 이런 해석은 잘못된 것임이 논증된다. 우리는 상징과 비유를 적절히 해석해야 한다.
 이러한 성찬식을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성찬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그리스도 죽음의 헌신에 대한 계속적인 기념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몸과 피를 통해 우리의 죄를 사하신 속죄 제물이 되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금 가르치며 우리의 신앙을 성장케 하기 위함이다. 성찬식은 제사나 신비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성찬식의 참된 의미를 알고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
 성찬에 참여한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그날 밤에 예수님을 다 버릴 자(31절)이며,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 할 자였다.(34절) 그런 그들을 성찬에 참여케 하셨다. 성찬에 참여하는 자, 성도들도 매우 부족한 자들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이 성찬에 참여하도록 허락하셨다. 우리는 스스로가 대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총 때문에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점검해보아야 한다. 예수님께 순종하도록 더욱 나 자신을 깨뜨려야 한다. 더욱 겸손한 자세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히 주를 고백해야 할 것이다.

[26:36-46] 겟세마네의 기도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고민하고 슬퍼하셨다.(37절)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죄라는 짐을 짊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우리의 죄가 전가된 것이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 죄의 무게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거룩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죄를 짊어지신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이었겠는가! 스콧트는 이렇게 말한다. "이때의 그리스도는 순결한 양심과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완전한 사랑, 그리고 영광스러운 사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정죄받은 영혼들이 겪어야 했던 것과 같은 고통을 겪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고통을 겪을 때 기도하셨다. 우리가 곤경에 처해있을 때 가장 먼저 기도해야 한다. 욥처럼 예배하며(욥1:20), 히스기야처럼 주님 앞에 모든 문제를 펼쳐 놓아야 한다.(왕하19:14)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신다. 우리의 믿음에 대한 표시로 우리는 그분께 나의 고난을 숨기지 않고 얘기해야한다. 이는 우리의 믿음의 표시다. 그리고 우리는 응답을 받을 것을 확신해야만 한다.
 예수님은 그러나 그 고통을 친히 감당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완전히 굴복시켜야 한다. 이는 우리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9절)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만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함께 기도할 것을 촉구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따라야 한다. 성도들은 비록 회심하고 새로워졌을 지라도 여전히 죄의 몸을 지니고 있다. 내가 선을 행하기를 원할 때에도 악이 나와 함께 존재한다.(롬7:21-23) 이 원리를 예수님은 하나는 육신, 하나는 마음이라 표현하시며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41절)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의 약점을 예수님은 분명히 알고 계셨다. 그러나 그 약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넘어져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약점이 있기에 깨어 기도해야 한다.

[26:47-56] 거짓 사도의 입맞춤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 삼십에 팔아 넘긴다. 예수님께서는 슬퍼하셨을 것이다. 그 슬픔의 원인은 우리의 죄다.(롬4:25)
 이런 제자들의 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과 교제하면서 자비하고 겸손하게 그들을 대하셨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발견 후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하고 입을 맞춘 것을 통해 이를 잘 살펴볼 수 있다. 당시 동방에서는 친구를 만날 때 서로 입맞춤으로 인사했기 때문이다.(출18:7;삼상20:41) 가룟 유다가 스스럼없이 이 행동을 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이런 인사를 자주 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를 얻는다. 가장 위대하고 거룩하신 예수님이 사랑과 자비와 겸손이 충만하셔서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가 입맞춘 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싼다. 그 때 베다로는 예수님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세상적인 방법으로 검을 택한다. 예수님은 그런 세상적 방법에 대해 힐책하신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거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검을 꺼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대로 사랑과 온유로 대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 살고 있고 그 혈기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우리 안에 숨겨진 칼을 꺼낼 때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를 분명 힐책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가 아니라 영에 속한 것이다.(고후10:4)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잡으러 온 자들을 고치히는 분이다. 그리고 스스로 잡히신 분이다.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음을 예수님은 말씀하신다.(51절) 그러나 스스로 붙잡히신 까닭은 구약의 약속과 상징들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이 일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자신의 의지로 기꺼이 고난을 받고, 시험을 받고, 저주를 받은 예수님을 기억하자. 이토록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 사건의 마지막은 제자들의 도망으로 끝을 맺는다.(56절) 바로 몇 시간 전에 자신있게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한 그들이 예수를 버린다.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연약하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의지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더욱 겸손히 주를 의지해야 한다.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시119:17)

[26:57-68] 공회 앞에 서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 죄인임을 선고받으신다. 이 일은 모두 계획된 것이다. 속죄의 위대한 날이 왔다.
 예수님을 죽인 자들은 유대 민족이기 보다는 가야바와 그의 동료들이었다. 고위 성직자라는 직분이 죄를 범하지 않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오래 신앙 생활을 했다는 것이 이를 보증하지 못한다. 우리는 성직자들에게 교육을 받아야 하나, 그들의 가르침을 분별할 만한 지혜가 요구되는 것도 사실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되어있어야 한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 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리라"(사8:20)
 예수님은 공회에서 자신이 메시아인 사실과 장차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애 마지막에는 대부분 자신의 재림에 관한 경고적 예언을 하셨다. 이는 다니엘 7장을 통해 예언된 바이며, 이후 계시록 1:7에서도 분명 예언된 바다. 끊임없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우리는 그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했으나 거짓 증거만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의 부패를 보자. 주님이 유죄 선고를 받으신 후 모욕한 이들은 바로 직전에 "호산나"를 외치며 그를 찬양한 자들이었다. 우리의 마음은 이토록 믿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모든 모욕은 이미 700년 전에 예언된 것이었다.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사50:6) 하나님은 이러한 모든 수모와 고난을 알고 계셨음에도 제2위격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이 고난을 받기 위해 오셨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이토록 크고도 깊다.
 예수님은 진리 때문에 친히 고난을 당하셨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자는 복이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그 본보기가 되셨다. 우리는 주를 본받아야 한다. 물론 항상 고난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를 위하여" 신념을 굽히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26:69-75] 베드로의 부인
 물론 예수님이 모욕을 당하긴 했으나, 아직 베드로에게는 어떤 위험과 폭력도 가해지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불과 몇 시간 전 예수님을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베드로는 단순히 부인할 뿐 아니라 저주했다. 3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수많은 경험을 하고 말씀을 들은 그의 믿음은 이렇게 연약했다. 베드로 뿐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은 이처럼 연약하다.
 베드로의 부인을 보다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베드로는 자신감이 있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그는 나태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그는 잠을 잤다. 그리고 비겁하게 타협했다. 예수님과 함께 대제사장에게 간 것이 아니라 멀찍이서 그를 쫓아갔다. 마지막으로 그는 악한 무리 속에 섞여있었다. 대제사장의 집에 가서 마치 하속들 중의 한 사람처럼 함께 앉았다. 그것은 그 자신의 행위의 열매였다.
 성도들도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넘어질 수 있다. 우리는 드러내놓고 죄를 범하기 전에 이미 은밀하게 죄를 범하고 있다. 그것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고 통곡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참된 신자와 위선자의 차이를 보여준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에 이 땅에서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차이는 그 이후의 문제다. 다윗은 간음했고, 요나는 불순종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 죄의 결과로 벌어진 나와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를 슬퍼하며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은 무한하셔서(애3:22) 우리를 다시금 일으켜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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