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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14일 토요일

마태복음 27장

[27:1-10] 가룟 유다의 최후
 로마인들의 허락없이는 어느 누구도 죽일 수 없었다. 그래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로마인인 빌라도에게 넘긴다.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또한 보게 된다.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연관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의 중심적인 테마는 가룟 유다의 죽음이다. 여기서 우리는 몇가지 교훈을 살펴볼 수 있다.
 유다의 최후에서 주님께 덮어 씌운 모든 고소가 예수님의 무죄를 증명하는 증거임을 보게 된다. 가룟 유다는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며 그의 모든 언행을 살핀 자다. 그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예수님의 무죄를 가룟 유다가 잘 알고 있었고, 그 죄책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는 공회에, 빌라도 앞에 나가 예수님께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양심과 죄책감으로 인해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없었다.
 유다가 죽기 직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었다. 이는 그가 자살을 한 것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너무 늦어서, 너무 큰 죄여서 회개를 못할 것은 없다. 그 어떤 죄도 예수님의 대속으로 용서받지 못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는 그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알지 못했다. 그는 비록 자신에게 남아있는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했으나 그것이 참된 회심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만약 참된 회심으로 이어졌다면 그는 예수님을 변호하는 자로서 살아가야만 했다. 우리는 죄를 깨달았다면 그 순간 회개해야 한다. 지금이 받아들여야 할 때이며 오늘이 구원의 날이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심지어 예수님 옆에서 죽어간 강도는 죽기 직전에 예수님께 고백하고 구원을 받지 않았는가!
 유다의 죽음을 통해 인간이 커다란 특권을 갖고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한다.(잠29:1) 유다를 기억하며 죄를 범하는 것을 소홀히 여기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시금 구약의 예언을 살펴볼 수 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 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슥11:12-13) 유다는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했다고 자책하며, 은을 성소에 넣고 자살했다. 대제사장들은 핏값을 성전에 둘 수 없다고 하여 토기장이의 밭을 샀다. 하나님께서는 세세히 예언을 하셨고, 그 예언은 이루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중대한 실수가 발견된다. 여기서 분명 마태는 스가랴를 인용했는데, 예레미야를 인용한 것으로 나타난다.(9절) 어거스틴은 이를 마태가 실수를 한 것이 아닐까 하는데, 이는 성경의 축자 영감설을 크게 해친다. 축자 영감설이 무너지면 우리의 토대는 무너져버린다. 그 외에 다른 견해로는 ⓐ예레미야에 의해 쓰이지는 않았을지라도 그에 의해 이 말씀이 전달되고 스가랴에 의해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행20:35에서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고 유다서는 에녹의 예언을 가지고 있음(유1:14)이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예언을 포함하는 구약성경의 모든 부분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예레미야의 이름이 사용되었으며, 이 말씀 또한 예레미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마태는 "선지자"라고 썼는데 필사자의 실수라는 견해가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리아 역본에서는 예레미야라는 이름을 생략하고 "선지자"라고만 말하고 이다. 페르시아 역본도 그러하다. ⓓ마태가 "스가랴 선지자"라고 썼는데 필사자의 실수로 바꼈다는 견해가 있다. 그 근거로는 사본에서 이름들이 종종 간결하게 쓰였고 Iou, Zou는 비슷하다는 것을 기억했음에 틀림없다.

[27:11-26] 빌라도의 재판
 예수님은 빌라도와 가야바에 의해 내려진 부당한 판결을 묵묵히 견디셨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는 이사야의 말을 이루셨다. 성도는 이런 예수님의 무언의 고통에 빚진자다.
 빌라도는 분명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알고 있었다. 빌라도는 예수께서 죄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질투가 많으며 난폭한 지도자였다. 또한 그는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했다. 그는 정의와 양심의 항의를 짓눌러 버렸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게 넘겨주었다.
 우리는 이러한 빌라도의 모습에서 우리가 생활함에 있어서도 편의가 아니라 원칙을 추구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사람을 두려워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한다.
 또한 본문에 등장한 유대인들을 통해 인간 본성이 얼마나 사악한지를 보게 된다. 빌라도는 명절이 되어 악독한 죄수인 바라바와 예수 중 한 명을 풀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이는 다시금 생각을 할 기회를 준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쳤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이셨다. 착한 일을 행하시고 귀신 들린자를 고치신 분이었다. 인간의 어떤 법도 어긴 일이 없으신 분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미움을 당했다.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어둠을 보기에, 그들은 빛을 싫어했다. 이 세상과 사람들은 악하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놀라기보다는 그것을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렘17:9)

[27:27-44] 십자가에 못박히심
 예수님은 빌라도로부터 정죄함을 받은 후 로마 병사들에게 넘겨져 마지막 수난을 당하신다. 이 모든 슬픔의 원인은 우리의 죄다.(고전15:3)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잡히기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 기도하신 후, 유대 공회, 빌라도의 법정을 통해 이미 두번이나 고통과 부당한 고소를 당하셨다. 조롱과 채찍질 당하셨다. 그리고 로마 병사에게 넘겨져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다. 그리고 벌거벗겨져 십자가에 매달린 상태로 마지막까지 조롱과 욕설을 들으셨다. 예수님은 극도의 육체적 고통을 겪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통을 참지 못하여 비명을 지르시지 않았다.
 이 고통에 대해서도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언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시69:21)의 말씀은 34절을 통해 성취되고,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22:17-18)는 말씀은 35절을 통해 성취된다.
 예수님이 당한 이 고통은 온전히 우리의 죄 때문이다. 이를 성경에서 끊임없이 증거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며"(벧전2:24)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고"(벧전3:18)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었으며"(고후5:2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가 되셨고"(갈3:13)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히9:28)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며"(사53:5)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다"(사53:6)
 예수님은 우리가 낫게 하기 위해 채찍에 맞으셨다. 우리에게 영광의 관을 씌워주기 위해 가시관을 쓰셨다. 우리에게 영원한 의의 옷을 입히기 위해 옷 벗김을 당하셨다. 우리를 명예롭게하고 복주시기 위해 조롱과 욕설을 들으셨다. 우리가 죄 없이 여김받도록 하기 위해 죄인으로 여겨져 범죄자들 가운데 속하게 되셨다. 온 힘을 다하여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자라는 외침을 들으셨다. 예수님은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게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평안을 얻는 열쇠다.
 그리스도의 모든 고통에는 무한한 유익이 있다. 위대한 속죄가 있다. 우리의 죄를 위해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죄를 더욱 혐오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사랑해야 할 것이다.

[27:45-56] 그리스도의 죽음과 표적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22:1)
 다윗의 이 고백은 하나님에 의해 버려진 예수님을 예언한 것이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디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46절)
 예수님은 이 모든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러 오셨고, 성취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렇다면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이는 세상 죄가 주는 거대한 짐이 주님의 영혼에 미치는 압박감을 표현한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대리인으로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시고,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를 주님께서 몸으로 받으셨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이 표현보다 더 강하게 죄의 죄됨과 그리스도의 고통의 대속성을 증거하는 것은 없다. 이 외침으로 우리는 죄를 미워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한다.
 "주님은 자신이 인류를 대신해서 온 세상이 죄로 마땅히 받을 아버지의 인류에 대한 진노를 깊이 의식한 상태에서 이 말씀을 하셨다. 주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하나님께서 잠시 그를 외면하셨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또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자신의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확실하고 은혜롭게 도우실 것을 확고하게 이해한 자신의 믿음의 힘을 의미한다." (Bishop Hall)
 "영원히 저주받은 자의 울부짖음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 속에 강조된 것과 같은 죄의 사악함과 쓴 맛을 표현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한다."(Jamieson)
 예수님의 최후를 묘사할 때 성경은 간단히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시니라"(50절)고 표현한다. 예수님의 죽음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고뇌와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았을 뿐 그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 이 죽음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만족시켰다. 이 죽음은 모든 인류의 앞날에 영향을 미치는, 인간의 죄에 대한 완전한 속죄와 화해의 본보기가 되었다. 우리의 죄는 얼마나 무서운가!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그 저주받은 나무 위에서 돌아가셨을 때 땅이 진동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세상의 굳건한 토대가 흔들리고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사53:10)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순간 유대 성전에서는 성소의 휘장이 둘이 되는 기적이 발생했다. 이만큼 놀라운 표적은 없었다. 이 찢어짐은 지적인 모든 유대인들의 마음을 찌르고, 가야바의 양심을 찌르며 당황케 했을 것이다. 또한 이 나뉘어진 휘장은 의식법의 종결을 선언한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모든 제사를 완성하셨기에 더이상 그러한 구약 시대와 같은 의식은 필요가 없게 되었다. 참된 어린양이 도살당했고, 참된 언약궤의 뚜껑이 드러났다. 그리고 이 나뉘어진 휘장을 통해 구원의 길이 모든 인류에게 열렸음을 선포한다. 그 전까지 하나님의 임재는 유대인들에게만 희미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으로 어둠과 신비는 사라졌다. 그 어떤 제한 없이 복음은 전파되게 되었다.
 우리는 이런 사랑과 동정을 베푸신 예수님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자.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험하시고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 분이다. 이 세상에서 연약한 몸과 마음을 가진 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 뿐이다.

[27:57-66] 무덤에 장사되심
 우리의 구원자가 시작한 위대한 구원의 업적을 성취했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셨던 그 성스런 몸이 부활해야만 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모든 업적에 대한 인침이요 초석이다.
 예수님은 부자의 무덤에 장사되셨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는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사53:9) 심지어 이것도 구약에 예언된 것이었다. 우리는 성경의 위대함을 더욱 깨닫자. 예수님은 고통받으셨고 돌아가셨으며 장례가 치러졌다.
 예수님은 알려지지 않은 친구들이 있었다. 예수님이 죽었을 때 아리마대의 요셉이 나아와 주님을 묻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한 자였다. 이 사실은 이 지상에 주님을 알지만 알려지지 않은 많은 참된 성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며,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준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그 가운데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참되게 믿지 않는 자들을 많이 보게되어 우리는 많은 실망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보지는 못하지만 38선 너머 이북에도 참되게 하나님을 믿는 형제 자매들이 있음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들을 나의 시선으로 한정짓지 말자.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때 공공연히 자신이 사흘 뒤 부활할 것을 공언하셨다. 이 말씀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기억하기에 빌라도에게 가서 무덤을 굳게 지킬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을 더욱 확증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들 자신의 수단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이러한 일은 교회사를 통해 반복되었다.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통해 말씀이 전파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행11:19)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여 우리의 지식으로 모두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정말로 그리스도인이 사라져만 가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고 우리의 걱정을 영광으로 바꿀 수 있는 분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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