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5:1-6]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1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에서 거듭 포도나무에 비유되었다(사5:1,2,7;호10:1). 하나님은 귀한 포도나무를 심으셨는데, 그 포도나무가 악한 가지가 되었다(렘2:21). 그러나 매번 실패한 이스라엘과 달리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이시다(1절). 그리고 아버지는 포도나무를 보호하시는 농부이시다(1절).
그런 예수님께 붙어 있으나, 열매맺지 않는 가지를 아버지께서 버리신다(2절). 아버지께서는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요5:22;계20장). 따라서 여기서 아버지께서 버리시는 것은 구원을 받지 못함을 의미한다 보기 어렵다. 또한 "무릇 내게 붙어 있어(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새번역)"라고 표현되어, 예수님께 붙어 있음이 분명 표현되고 있다. "그것을 제거해 버리"신다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제거한다는 헬라어의 "아이로"를 번역한 것이다. 아더핑크는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단어를 "lifted up(들어 올리다)"로 번역함을 지적한다. 이렇게 해석하자면, 예수님을 믿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를 아버지께서 들어올려 보살핀다는 의미가 된다. 예수님은 14장에 이어 이 말씀을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 즉 믿는 제자들에게 설파하고 있기에 이는 더욱 설득력 있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도록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2절).
2절과 3절의 "깨끗함"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2절은 열매에 대한 얘기다. 즉, 믿음의 결실이 나타난 자를 칭찬하시며, 더욱 거룩하게 성장하도록 만들어가는 "깨끗함"이다. 반면 3절은 의롭다 여김받은 우리의 신분을 가리키는 "깨끗함"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깨끗한 자이다.
그러하므로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한다(4절). 물론 모든 성도는 예수님 안에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음"은 권고받지 않는다. 그러나"거하다"는 다르다. 이는 하나님과 사귐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권고된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은혜를 받는다. 그리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이다. 즉,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며, 진리를 가르치신다. 우리가 얻는 열매는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 예수님과 떨어져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밖에 버려져 마른다(6절). 즉 맛을 일은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된다. 예수님을 믿되, 그 영향력이 하나도 드러나지 않게 된다. 이어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는 말씀을 아더 핑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그들이 그것들(가지처럼 버리워진 자들에게서 나온 것들. 죽은 것들)을 모아다가 불태우신다." 여기서 불태움을 또한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3:15)"는 말씀으로 연결한다. 즉, 소돔과 고모라를 불에 태워, 구원받은 롯과 같이 말이다.
이와 같은 말씀 해석에 비추어 바라보겠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에서 속죄함을 받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는다. 그리고 회개한다. 반복한다. 그런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좌절한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를 통해, 행위를 통해 이 굴레를 조금씩 탈피하려 한다. 그런데 그 깨끗하게 되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렇게 만들때 되는 것이다. 예수 안에 붙들려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나 스스로의 힘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나의 무능을 깨닫고 주님을 붙드는 것이다.
[요 15:7-16]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2
종에게 "앞으로 친구로서 지내자." 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큰 사건인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이것이다(14,15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기에 가능한 것이다(16절). 나를 사랑하셨기에 택하셨다. 우리는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참된 성도의 모습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우리의 기도는 이루어진다(7절).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이므로. 포도나무에 붙들려 있을 때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그 열매에는 내가 자랑할 여지가 없다. 난 단지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맺는 열매는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8절).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9절).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말씀하신다(10절).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나의 기쁨의 근원이 된다(11절).
정리하면,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열매로 드러나게 되며, 그 자의 간구를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를 간절히 원하지만, 우리의 육신이 약하여 그러지 못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경험하는가(막14:38)! 그러나 우리 마음속의 그 불협화음을 아버지께서 주관하시어 더욱 주를 바라보고 그 사랑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신다는 말이다. 돌아보면,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배신한 탕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돌아오기를 바라시며, 우리가 돌아올 때 사랑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 가운데 실수하더라도 끝없이 사랑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얼마나 큰가! 내가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용서하셔서 성장하는 내가, 조금 자랐다고 해서 어찌 자랑하겠는가!
[요 15:17-27] 제자들을 격려하시는 그리스도
세상은 성도들을 미워할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속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움받을 때, 예수님께서(주인) 먼저 박해를 받으셨음을 기억하며 더욱 예수님께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예수님을 증언하실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박해 속에서도 신령한 복을 확신하며 성도로 살아갈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사회의 질타를 받고 있다. 이는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다. 그러나 정화된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핍박 받을 것이다. "왜 너희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데? 왜 다른 종교와 화합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사회에 공헌을 많이 했는가와 별개로 주어지는 문제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것이라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서 더욱 믿음을 굳건히 할 수 있다.
탕자가 아버지의 곁을 떠났을 때,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런 세상이 아버지의 품에 있던 사실에 불만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성도는 그런 자신을 받아주셨다는 사실에 감격해야 한다. 그리고 그 품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인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할 때 우리가 당할 세상의 미움을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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