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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31일 토요일

마태복음 12장

[12:1-13] 안식일의 참된 교리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시켰다. 예수님은 원래의 의미를 다시금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안식일 자체를 부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대한 잘못댄 생각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얼마나 피상적으로 알 때가 많은가! 이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우리는 그러하기에 더욱 힘써 말씀을 묵상하고 배워야만 한다. 사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복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을 이를 짐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래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예수님은 정말로 필요하고 선한 일이라면 안식일에도 할 수 있다고 허락하셨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꺽고, 주님이 병자를 고치시는 것은 율법에 대한 파괴가 아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는데 태만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편의대로 주일 성수를 범한 데에 대한 변명으로 삼을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의 자유의 남용을 위해 이를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선한 것을 향해 있으며 필요한 일을 금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또한 느끼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무슨 가르침을 주실 때마다 자신이 하나님임을 계시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는 6절에서 드러난다.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은 결국 그의 죽음과 부활이었으며, 자신이 누구신가를 끊임없이 알리기 위함인 것이다. 이를 놓치지 말자. 말씀을 읽으며 더욱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배우자. 그 때 우리에게 참된 가르침이 될 것이다.

[12:14-21] 우리의 소망되시는 그리스도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사악한가! 주님의 말씀이 너무도 명백했기에 변명할 수 없었던 바리새인들은 그를 죽이기 위해 의논했다. 그분이 비난할 죄를 지어서가 아니다. 선하시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악이 선을 미워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는 자였다. 그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손을 뻗으신 하나님의 은총은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그리고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그 십자가를 질 것이다. 세상이 증오하는 것은 믿는 자의 결정이 아니라 선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자리를 떠나신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가고,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고치셨다. 그리고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이를 마태는 이사야서(사42:1-3)를 인용해 묘사한다.(18-21절)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은혜가 적고 회개가 미약하며 믿음이 적은 자를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소중히 여기셔서 이를 꺾지 않으시고, 심지를 끄지 않으신다. 이 얼마나 크신 위로인가! 그리고 이러한 작은 믿음조차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분인가!
 그러나 한편 그것을 사탄도 소홀히 여기지 않음을 기억하자.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또한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며, 나의 믿음을 성장시켜 나가야 한다. 또한 작은 믿음도 소중하기에 믿음이 약한자를 격려하며 함께 나가야 할 것이다. "작은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슥4:10)

[12:22-37] 지식을 거스르는 죄
 앞 본문에서 예수님이 많은 이들을 고치시고,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그 때 한 사람이 귀신들린 자를 데리고 왔는데 예수님은 고쳐주셨다. 많은 이들이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웅성 대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힘을 빌려 쫓아내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얼마나 부당한 비난인가!
 그러하기에 사단이 사단을 물리친 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것인지 설명하신다. 초기 이단들은 아타나시우스를, 가톨릭은 루터를 그런 식으로 비난했다. 그리스도인의 논쟁에 답하지 못할 때, 그들의 업적을 부정할 수 없을 때 세상은 성도의 성품을 헐뜯는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참고 견뎌야 한다. 우리의 성품은 마지막 나에 드러날 것이다.
 믿음에는 중간이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거나 함께하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애매한 입장이 아니라 확실히 믿음의 노선을 행해야 한다. 가말리엘과 에라스무스가 걸었던 길은 누구에게도 행복과 유용함을 주지 못했다.
 또한 알고도 행치 않는 죄는 굉장히 크다. 바리새인들은 주께서 행한 일을 능히 보고서, 성령을 힘입어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을 보고서도 돌이키지 않는다. 믿는 가정의 자녀로서 태어났으면서, 교회에 꾸준히 나가면서도 참되게 회개하지 않는자가 얼마나 많은가. 나는 그런 이들을 보며 안타까워하며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더욱 달음질 해야겠다. 이러한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우리는 결코 지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입술은 우리의 마음을 드러낸다.(34절) 우리는 행위 뿐 아니라 우리의 말을 조심해야 한다. 내가 실수로 말한 것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박혀 그것이 믿음으로 나아가는데 장애물이 되지는 않는가? 결국 그것은 나의 입술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의 구원을 방해하는 일이 아닌가! 늘 혀를 조심하자.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가!(약3:2) 주께서 우리의 말을 심판때에 심문하실 것이다.

[12:38-50] 그리스도의 사랑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달라 구한다. 그 때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신다. 때로 신약의 기록을 믿는다고 고백하며 구약을 신화로 치부해 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구약을 말씀하신 그리스도를 비웃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은 같은 권위를 갖는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표적을 구한 것은 주의 제자가 되기 위해 구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미 행하신 예수님의 놀라운 일을 외면할 리 없다. 이미 충분히 증거를 보이셨다. 이러한 불신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표적을 통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표적은 주어졌다. 우리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종교적 개심은 매우 위험하다. 귀신이 잠깐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때 일곱 귀신이 들어와 이전보다 더욱 형편이 심하게 되었다. 이는 유대인들의 교회와 국가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처음 애굽에서 택함을 받았을 지라도 그들은 우상 숭배하는 성향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후에 바벨론에서 놓였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에 보답을 하지 않았으며, 세례 요한의 설교에도 겉으로만 회개했다. 형식만 남은 무감각 상태에 빠졌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는 처음보다 훨씬 나쁠 것이다. 오늘날 모습은 어떠한가! 심히 두렵지 않은가! 이는 이미 예견된 모습이다. 그에 대해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더욱 온전히 주님만을 신뢰하며 의지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참 제자들을 부드러운 사랑으로 대하신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형제이며 자매며 모친이라 말슴하신다. 이 은혜를 그 누가 상상할 수 있는가! 나중에 우리를 대적하는 자는 왕의 친족을 박해한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세상에서 연약해 보이나 그것은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 보다 훨씬 영광스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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