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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1일 일요일

마태복음 13장

[13:1-23]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예수님은 그날 집에서 나가셔서 말씀을 다시 전하신다. 자연을 통해 비유로 말씀하신다. 이 세상 만물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어두워 그것을 보지 못할 따름이다. 성도는 믿음의 눈으로 세상 만물을 보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는 어느 곳에서든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나 자신을 더욱 채찍질해야 한다. 그런데 참된 믿음은 어떠한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다. 결실을 맺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현상이다. 우리는 말씀 위에 서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가르침을 능히 깨달아야 한다. 듣지 않고 이를 경험할 수 있는가? 우리는 더욱 말씀을 가까이 하며 내가 더욱 깊이 뿌리 내리기 위해 묵상해야 할 것이다.
 또한 여기서 설교자의 일은 씨 뿌리는 자로 나타난다. 우리는 말씀을 뿌려야 한다. 부지런히 수고해야 한다. 또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도 참을 성 있게 파종해야 한다. 우리의 성공은 물론 우리의 수고에 달린 것은 아니지만, 수고와 근면이 있을 때 성공할 수 있다.(사32:20;딤후4:2;전11:4)
 그러나 생명을 주시는 자는 하나님이다. 우리는 씨를 심고 물을 줄 뿐 자라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다.(고전3:6) 또한 우리 자신이 자라나기 위해 우리는 충성스럽게 씨를 뿌려야 한다.
 무심한 태도로 말씀을 듣거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상급에 대한 믿음이 없어 조금만 힘들면 신앙을 내팽개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얄팍한 감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마음이기 때문이다.(렘17:9) 또한 에스겔 당시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단순히 말씀을 듣는 것이 좋다고 믿음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겔33:32) 믿음은 결국 지, 정, 의가 함께하는 전인적인 것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무익하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말씀을 바로 들었다는 증거는 오직 하나님 뿐이다. 또한 우리 편에서 그 증거를 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열매다. 참된 회개와 믿음, 거룩한 생활과 성품, 사랑, 기도, 겸손, 자비...
 화려한 언변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참된 것은 내가 스스로 체험하며 참되게 믿는 것이다.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약1:22)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가 되지 말자.(사6:9)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자.
 예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성도를 향한 것임을 다시금 기억하자.(11절)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심으로 성도들은 더욱 주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 것이며, 그렇지 못한 자는 여전히 헤맬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깨달아 아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비유가 아니더라도 깨닫지 못한다.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하며 늘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로 간구하고, 말씀을 읽음으로써 노력해야 한다. 그러할 때에 성도는 더욱 많이 받아 넉넉하게 될 것이다.(12절)

[13:24-43]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계속해서 예수님은 비유로 가르치신다.(34절) 이것은 예언된 바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의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라"(시78:2-4) 우리는 이 비유를 깨달아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주의 말씀을 널리 전해야할 의무가 있다.
 이 비유는 세상 끝 날까지 선과 악이 교회 안에 함께 존재할 것을 가르쳐 준다. 어떤 훈련도 이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가라지를 뽑으려고 너무 열광적으로 나서다 보면 그것과 함께 곡식도 뽑게 될 위험에 빠진다. 가라지를 뽑을 때 성도는 곡식에 미치는 영향도 생각해야 한다. "오늘 가라지인 사람은 내일 곡식이 될 수도 있다"라는 어거스틴의 말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완전한 교회를 발견할 수 없다. 회심하지 않은 많은 성도가 있다고 교회를 옮기려 할 때에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그럴 때 실망의 나날만 보낼 수도 있다.
 그리고 세상 끝 날에 교회의 경건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나뉘어 심판을 받을 것이다. 경건하지 못한자는 이 말씀을 들을 때 두려워해야 한다. 귀가 있다면 들어야 한다. 벡스터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불경건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를 오해해서는 안된다." 한편으로 성도는 이 말씀을 통해 위안을 받을 것이며 행복과 안전이 예비되어 있음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13:44-50] 보물과 진주와 그물의 비유
 앞 본문과 같은 교훈을 말한다. 보물과 진주의 비유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보물은 애써 구하지 않았던 자에게 발견되었고, 진주는 애써 찾고 있던 사람에게 발견되어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발견한 이후 그들은 그것을 자기 소유로 삼기 위해 모든 것을 팔았다. 같은 행동을 했다.
 구원의 중요성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 영생을 얻기 위해 모든 희생을 각오해야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조롱할 수 있으나 우리는 좋은 거래를 했음을 확신한다. 성도의 행위는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을 향하여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상해 줄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물의 비유는 보이는 교회의 참된 본질에 대해 가르친다.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는 택함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가 혼합되어 있다. 심판 때에 분명한 구별은 있겠지만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를 끊임없이 보게 될 것이다. 외적인 교인으로 결코 만족해서는 안된다.

[13:51-58] 고향에서 배척당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말씀을 맺으며 이 비유들은 깨달았는지 묻는다. 나는 말씀을 읽으며, 설교를 들으며 그 깊은 의미들을 깨달아 알고 있는가?
 이 말씀을 치고 예수님은 고향에 가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 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에 놀랐으나 그를 배척했다.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비로운 대우를 받으며 쉽게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자비를 멸시한다. 기독교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기에 더욱 배척을 당한다. 경건한 사람들의 친족, 이웃, 훌륭한 성직자의 교인이 회심하기 어려운 청중일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자도 그를 배척하지 안았는가! 우리의 본성을 이 말씀을 통해 깊이 깨달을 수 있다.
 이러한 불신앙의 결과로 예수께서는 고향에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않으셨다. 믿으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멸망한다. 우리는 주 앞에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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