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2] 세례 요한의 사역 (막1:1-8;눅3:1-18;요1:19-28)
세례 요한은 누구인가? 3절에서 그는 스스로를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고 말한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사40:3-5)
1절에서 '유대 광야'에서 전파한다는 말은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다시금 상기시키는 것이다.
또한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 매우 소박한 음식을 먹고, 엘리야를 비롯한 사회의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복장을 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그의 가르침을 살펴보자.
그의 가르침은 '회개'다. 이 회개는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을 통해 드러난다. 요나가 니느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이 그의 뜻을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욘3:10) 돌이키셨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비난한다. 독사로 불리는 것만으로도 심각한 일인데, 어미를 잡아먹으면서 태어나는 독사의 자식이라 비난하는 것은 매우 나쁜 일이다. 게다가 그들 스스로 십계명을 온전히 지킨다고 여기는데, 이는 5계명과 6계명에서 벗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회개해야 한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의롭다 여김을 받아야 하며, 먼저 참된 회개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3절에 나타난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은 회개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임박ㄷ한 진노에서 피할 수 없다.
우리가 행하는 세례는 의식적이며 상징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치는 의식이며 증거다. 물론 세례를 받는 자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에서 그에게 나아와 자기 죄를 자복하고 받았다. 여기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세례받는 자의 자세이다. 세례를 받는 자는 그 세례에 대한 갈급함으로 어디서든지 나아와야 하며, 스스로의 죄를 자복해야 한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세례는 물로 세례를 베풀어 불완전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인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기 위함이다. 즉 우리가 회개하기 위해서는 나의 의지와 본성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성령의 고유한 사역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이가 예수님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의 불완전한 세례를 완성하시는 이는 예수님이시다.
거짓된 회개와 경건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보라. 거짓된 경건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없다.
모든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다.(9절) 앞에서도 말했으나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어떠한가? 좋은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지고(10절),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12절). 이러한 지옥에 대한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셨다. 우리는 이를 결코 축소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공의로 판단할 때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친히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는 더욱 감사해야하며, 참된 신자가 누리는 안전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감사해야한다.
또한 여기서 예수님에 대해 증거한다. 앞서 그리스도는 예수(구세주), 임마누엘, 말씀의 성취자이심을 충분히 증거했다. 여기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 회개하기 위해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하나님이심을 또한 증거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직접 나가야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 자신과의 연합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이는 자비와 은총과 생명과 평화에 대한 약속된 원천이다. 또한 우리는 그분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할만큼 능력이 충만하시다.(전능하신 하나님) 그런 그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얼마나 큰 은혜며 직접 세례를 베푸시는 것은 얼마나 큰 감격인가!
[3:13-17] 그리스도의 세례 (막1:9-11;눅3:21-22)
그 누구보다 위대하신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기에 세례 요한은 말리며 '내가 당신에세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찌)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14절)라고 말한다. 요한은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으나, 그 자신도 예수님께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줄 너무도 잘 아는 대목이다. 이것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물세례는 아무 필요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으신다.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인치는 것이다. 새로운 교인을 받아들이는 것에 우리의 큰 관심이 필요하며 이것은 기도를 일으킨다. 우리는 세례와 은혜가 서로 뗄 수 없이 매인 것이 아님을 깊이 확신할수록 누군가 세례를 받을 때마다 축복하는 기도를 더욱 간절히 드려야 한다.(마태복음 강해, 존.C 라일)
유대 제사장들은 30세가 되어 그들의 직책을 받을 때 물로 씻음을 받았다. 그리스도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완전한 왕, 제사장, 선지자로서 오신 분이다. 따라서 이 장면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일하심을 세상에 공표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예수께서 그런 세례 요한의 말에 응답하신 것을 살펴보자.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절) 예수님께서는 너무나도 낮은 자, 즉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께서 이토록 낮아지심을 통해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세례를 받으시는 것은 그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천국이 낮은 자의 것이라고 외치시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았을까? 그에 반해 나의 모습은 얼마나 교만한가! 더욱 하나님의 섭리 안에 깨어져야겠다. 또한 아무리 겸손히 행해야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요한은 순종한다. 무엇이든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순종해야 한다. 마치 호세아가 그랬듯 말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16절) 그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임하셨다.(16절) 그리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다. 하늘의 소리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때 이후로 처음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그토록 위대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삼위의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신 일이다. 삼위의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천지 창조를 하셨듯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신약의 첫부분에서 함께 일하신다. 비천한 우리를 구하기 위해 삼위의 하나님이 함께 일하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은혜인가! 또한 이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계시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인 것이다. 이로서 제 예수님이 제 2위격의 하나님이심을 공표하는 것이다.
시편에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2:7)'라고 말씀하신 말씀을 다시금 증거하신 것이다.
앞서 15절에서 모든 의를 이룬다고 하셨는데, 세례를 통해 예수님을 공표하는 사실이 그것이지 않나 생각해본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 속죄함을 입었고, 예수를 통해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 모든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입으며 평강 가운데 살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의 지혜로 이를 알 수 없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공표하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선포하시는 이 사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까? 따라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해볼 때 나는 더욱 선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행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예수와 합하여 동행하기를 갈망해야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