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6] 포도원 품꾼의 비유
하나님은 자유롭고 주권적이며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푸신다. 이는 모두 주님의 방법이다. 우리는 그에 대해 비평할 자격이 없다. 우리는 먼저 믿었다고 교만해서는 안된다. 먼저 믿는 자와 나중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은혜를 베푸신다. 우리는 나중 믿는 자를 보며 기뻐하고 감사해야지, 그들의 품삯에 대해 항의할 수 없다. 내가 얻은 품삯도 은혜로 받은 것이 아닌가! 우리에게 사랑이 충만하다면 이런 교만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먼저된 자라 여길 때, 내가 선 줄로 여길 때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혹시 나는 이스라엘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우리는 모두 알 수 없다. 디모데처럼 어릴적부터 믿음 안에 자라는 이도 있으나, 십자가 강도처럼 죽기 직전에 회심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 하나님 앞에 용서함 받았다. 우리는 결코 교만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의 구원에 나의 의를 자랑할 여지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의롭다 여기심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천국에서 똑같은 영광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하는 대로 상을 주신다.(고전3:8)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교만과 자랑을 위해 주신 말씀이 아님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또한 이 말씀을 통해 누군가는 왜 빨리 예수를 믿는가? 세상에서 즐길 것은 최대한 즐기고 죽기 직전에 믿으면 되지 않는가?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이 은혜받을 만한 때다.(고후6:2) 은혜의 때가 주어졌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하자.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며 교회에 출석하는 자라면, 그 자신에게 참된 믿음이 있는지 점검해 봐야할 것이다. 참된 믿음에는 고난은 있으나 위로와 안식이 있다. 그 상이 이 세상에서도 충분히 주어진다. 우리의 회개를 미뤄서는 안된다.
[20:17-23] 제자들의 신앙과 무지
예수님은 이 땅에 죽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다가옴을 아셨기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자신의 앞날이 고통임을 미리 아는 것은 얼마나 더 큰 고통이겠는가! 예수님은 그 고통을 친히 감당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이를 피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자유 의지로 고통을 당하셨다.(요10:18) 세상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과 죄인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죽으셔야 했다. 이토록 중요한 사건이기에 예수님은 죽기 전에 세 번이나 강조하셨다.
물론 예수님은 왕으로 오실 것이며 세베대의 아들들은 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예수님께 구한 상황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죽음을 말하셨으나 그들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과 육의 욕망에 가득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주님의 보상만을 바라봤으나, 참 성도는 먼저 주님의 고난에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벧전4:13) 이 말씀을 오늘날 교회에 비춰보자. 많은 성도들이 이 고난과 죄라는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세상에서의 부와 명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약한 자리에 있을지라도 성도다운 삶을 살아내자는 다짐보다는 세상에서 잘 되야한다는 욕망이 더욱 가득하다. 예수님의 영광은 우리의 순종으로 이루어지는 것일진대, 우리가 세상에서 부와 명예를 쟁취하여 드러낼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조국 교회는 더욱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이 본문을 볼 때, 이처럼 믿음이 연약했던 요한과 야고보가 교회의 기둥으로서의 역할을 참되게 감당한 사실을 본다. 우리는 현재 믿음이 약할지라도 그 믿음이 자라날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이를 위해 우리의 지식을 더욱 풍성케 하며, 주님의 뜻에 더욱 복종해야겠다. 예수님은 요한과 야고보의 바르지 못한 간구에 힐책하셨다. 그들이 그런 간구를 한 까닭은 그들이 진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된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가 참된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끊임없이 변화되고, 진리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 말씀으로 더욱 주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 안에서 간구하는 자녀로서 살아야겠다.
[20:24-28] 큰 자의 참된 표준
앞서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의 간택을 듣고서 다른 열 제자들은 분히 여겼다. 이때 분명히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성도였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이 아직 연약하기에 아직 마음 속에 있는 교만과 시기심을 쉽게 벗어버리지 못했다. 오늘날 교회에도 많은 분쟁이 있다. 물론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그런 연약한 모습이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 때 교회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은 오랜 세월 믿음 안에 성장하며 더욱 낮아진 자들일 것이다. 이런 온유하고 겸손한 자들이 필요하다. 나도 제법 짧지 않은 세월 교회에 출석했다. 분명 내 또래에서는 내가 그런 역할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더욱 십자가에 못박고 주님만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 오셨다.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사랑이든 물질이든 받는 자가 되기보다는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행20:35) 이런 말씀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종종 자신을 모델로 보여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행할 바를 스스로 행하심으로 보이셨다. 우리는 자신을 닮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20:29-34] 두 소경을 고치심
이 소경들은 길가에 앉았다. 예수님께서는 여리고로 되돌아오시지 않았으므로 만일 그들이 길가에 있지 않았다면 다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부지런히 예수님을 찾았기에 만났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른 자녀들과 함께 모이고, 말씀과 기도로 더욱 나아가야 한다. 이 소경들은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에 무리가 꾸짖더라도 더욱 소리를 질러 찾았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할 때 종종 조그마한 방해물 때문에 넘어지고 주님을 찾지 않는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때 이 두 소경의 간구는 얼마나 큰 믿음을 함축하는가! 나는 많은 무리 가운데 저렇게 주님께 소리지르며 찾을 용기가 전혀 없다. 나의 자존심은 사실 별것도 아닌데 나는 그것때문에 주님을 놓치고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돌아본다. 그러나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할 때에 나 자신을 버리고 벌거벗은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반추할 때 이런 나의 태도가 얼마나 바리새인과 같은 모습인지를 돌아본다. 나는 아직 그 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나도 이 두 소경처럼 큰 소리로 주님을 외치겠다. 그 때 주님께서는 나를 일으켜 주실 것이다.
은혜의 때, 구원의 때! 우리가 아름다운 덕을 선포해야 하는 이유!
답글삭제응.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졌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영생이 너무도 기쁘고 아름다움을 알기에 우리도 더욱 그 복음을 전하고, 또한 그 복음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나의 바르지 못한 행동들을 다잡기 위해 더욱 훈련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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