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 그리스도의 첫번째 기적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그려낸다. 세가지 관점으로 본문을 볼 수 있다.
1) 상징적 의미 : 1장은 유대교의 실패를 보여주는데, 본문에서도 이를 반복한다. 기쁨을 상징하는 포도주(시104:15;삿9:13)이 떨어졌다. 유대교는 종교 의식이라는 껍데기만 남아있었다. 혼인잔치에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여있었다. 6은 인간을 상징한다.(여섯째 날에 인간 창조, 계13:8) 이 항아리에 포도주가 비어있었음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의 어머니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다. 그녀는 예수님께 명령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그녀의 영적 무지를 보여준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대답하신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떠났으며, 영적인 것은 보지 못한채 그들 민족의 영광만을 바라는 육으로만 난 이스라엘이 배척받는다는 것을 보게 된다.
2) 예언적 적용 : 1절에서 "사흘째 되던 날"이라 시작한다. 사흘째 되는 날은 부활의 날이다.(호6:2) 그때 예수님은 새 이스라엘을 초청하시며 혼인하실 것이다.(사54;호2) 그리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우리를 기쁨으로 채워주실 것이다.
3) 실제적인 가르침 :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러하기에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리기 이전에 이미 이를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마리아가 예수님께 말한 것은 그녀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마리아의 요청을 묵인하시고, 자신의 방식대로 해결하신다. 이미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님께 마리아는 명령할 수 없으시며,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우리의 지성을 뛰어넘는 탁월함으로 해결하신다. 특별히 예수님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내 때"는 요한복음에 일곱차례 등장한다.(2:4;7:30;8:20;12:23;12:27;16:32;17:1) 예수님의 이 답변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의지에 복종해야 할 "그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때 그는 죄인의 손에 넘겨질 것이나, 그 전에는 인간들에게 복종해서는 안되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
그 다음 마리아는 예수님의 조용한 질책을 온유하게 받아들였다. 인간적으로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이를 받아들인 것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 천사의 말을 기억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질책을 받으면 겸손하고 온유한 자세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자존심 때문에 온전히 굽히지 못할 때가 참 많다. 더욱 하나님께서 나를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빚어가시길 기도한다. 또한 마리아의 이 모습은 우리의 기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님께 '명령'할 때가 많다. 그리고 들어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질책한다'. 이것이 얼마나 교만한 모습인지를 되새겨 봐야한다.
이제 이적 자체를 살펴보겠다. 예수님은 하인(인간)을 통해 이적을 행하시길 기뻐하신다. 그 이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섬기러 오셨기 때문이다. 또한 이 포도주 이적은 거듭난 자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 이전엔 빈 항아리처럼 쓸모없는 자였으나, 그 안의 물을 포도주로 바꾸실 뿐 아니라 넉넉히 주신다. 또한 포도주를 만드실 때 물을 채우셨는데, 물은 말씀을 상징한다.(엡5:26) 우리는 말씀으로 거듭난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첫 기적으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 이적을 행하셨다. 그리고 그 피로 인해 우리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또한 처음 포도주보다 나중 포도주가 좋은 것은 우리가 거듭나게 되면 이 세상에서는 조금 고난을 당할 수 있으나, 이후에 더 큰 면류관, 상급이 예비되어있다는 사실도 함축하고 있다.
[2:12-25]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그리스도
1) 상징적인 의미 : 마21:12,13에서도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사건이 나온다. 본문에서는 마태복음과 달리 앞부분에 이 사건이 등장하기에 예수님이 성전 정화를 공생애 초창기와 마지막에 두 번 행하셨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더 핑크는 연대기적 순서를 무시한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서의 내용과 구체적인 부분에서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왜 연대기적 순서를 무시하고 이렇게 빨리 기술했는가? 유대교의 비참한 실패를 다시 한 번 증언하며, 요한복음 2장이 제시하는 천년왕국에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적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이다. 앞서 유대교의 실패는 "알지 못한다"(1:26), "포도주가 없다"(2:3)으로 나타났으나, 여기서는 성전을 더럽힌, 능동적인 행위로 드러난다. 더 이상 '여호와의 유월절"(출12:11)이 아닌 "유대인의 유월절"(2:13)을 그들은 지키고 있었다.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이라 표현하심으로, 그들의 탐심을 드러내셨다. 유대인들은 우상숭배하지 않는다고 자랑했으나,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성전에서 탐심이라는 우상숭배(골3:5)를 발견하셨을 뿐이다.
탐심의 결과로 얻는 실패는 역사적으로 반복되어왔다. 대표적으로 로마 가톨릭의 면죄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도 이런 면모가 이따금씩 보인다. 그러나 그런 집단을 보기 이전에 우리 각 개인, '나'라는 한 개인을 먼저 살펴본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나는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다시 드리는데 왜 이리도 부들부들 떠는가! 사실 내가 받는 월급이 넉넉하지 못하여 학비, 기숙사비, 통신비, 그리고 식비를 모두 커버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과외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십일조를 드리냐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나는 드려야만 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아까워하는 것이 나의 현재 모습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리겠다.
2) 실제적인 교훈 : 예수님께서는 소와 양을 내쫓으시고, 돈을 땅에 쏟으셨으나, 비둘기는 가져가라고만 명하셨다. 왜냐하면 비둘기는 내쫓으면 날아가버려 주인이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모세, 엘리야와는 달리 진노하심 가운데서도 신중히 행하셨다. 모든 이들을 꾸짖으셨으나, 아무도 상처받거나 잃지 않았다. 모세, 엘리야와는 다른 모습이다. 나와는 정반대되는 모습이다. 우리는 비진리에 대해 분노해야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모습은 신중하고 지혜로워야 하며, 그것으로 우리의 판단히 흐려져서는 안된다. 이런 모습이 내게 너무도 부족함을 알기에 더욱 성령의 은사인 절제와 온유를 사모하겠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이런 일을 행하는 네가 어떤 표적을 보이겠느냐고 따진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면 사흘 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의 부활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누차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셨으나 심지어 제자들도 이를 믿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의 죽음에 낙담했고,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달려가 부활을 증거할 때도 믿지 않았다. 우리는 성도라고 하나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할 때가 참 많다. 이는 우리의 믿음의 부족을 드러내는 징표다. 우리는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그 약속들을 믿는 믿음을 간구해야 한다. 현재 믿음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말씀을 들어야, 제자들처럼 후에 그 말씀을 기억하고 믿을 수 있다.(22절) 이를 보혜사께서 하실 것이다.(요14:26) 나도 말씀을 읽으며 매번 깨닫는 것이 다르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지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임을 기억하며 감사할 따름이다.
2장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비교하도록 하자.
전자는 흥겨운 모임이나, 후자는 심판의 장면이다.
전자는 예수님께서 초대를 받으셨고, 후자에서는 예수님께서 주도권을 쥐셨다.
전자에서 예수님은 인간을 도구로 쓰셨으나, 후자에서는 홀로 행하셨다.
전자에서 예수님은 포도주를 제공하셨으나, 후자에서는 성전을 비우셨다.
전자에서 예수님이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권유를 받아 행하신 것이나, 후자에서 성전을 정화하신 것은 도전을 받아 행하신 것이다.
전자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가리키셨으나, 후자에서는 자신의 부활을 가리키셨다.
전자에서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고(11절), 후자에서는 그의 아버지의 집에 대한 열심을 나타내셨다.(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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