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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9일 수요일

요한복음 3장

[3:1-8] 그리스도와 니고데모 1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으러 밤에 갔다. 이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라고 말하는데, "내가" 아니라 "우리가"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견해 뒤에 숨는 모습을 본다. 이후에도 여전히 밤에 찾아가지만, 산헤드린을 꾸짖고, 모든 사도가 도망했을 때 예수께 찾아가는 등(요7:50-51;요19:39) 그는 변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변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밤에 온 니고데모도 맞이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언제 찾아가든 환영하시는 분이시다. 이 사실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 생각한 근거로 그가 행하신 표적을 들었다. 그러나 애굽에서의 술사들도 이적을 행했다. 누군가의 인품이나 표적으로 그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알 수 없다. 이를 분별하는 것은 오직 말씀으로만 해야한다.(사8:20) 이 사실은 아직 거듭나지 않은 니고데모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첫 교훈인 본문에서, "거듭남"을 말씀하신다. 그만큼 중요한 사항이다.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물(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제서야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 거듭난다는 사실은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전에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이 땅에서 불완전한 육신을 입고있는 동안 우리 안의 육적인 성품과 영적인 성품은 끊임없이 충돌한다.(갈5:17)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이 새로운 본성으로 우리는 육적인 성품을 진압하며 더욱 예수님을 닮아갈 것이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한다.
 8절에서 성령을 바람으로 비유한다. 바람은 주권적이며, 저항할 수 없으며, 불규칙적이다. 이는 거듭나는 것이 우리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권적인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불가사의 하며, 기운을 돋아 주며, 없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만 한다. 우리는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한다. 거듭난 사람은 새 생명을 지닌 사실을 알지만, 어떻게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에 작용하시고, 의지를 꺾으시며, 새생명을 창조하셨는지 알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신비이다. 우리는 이에 감사해야 한다.


[3:9-21] 그리스도와 니고데모 2
 니고데모는 자연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정직하게 깨닫지 못한 것을 물었다. 성도들도 이러한 니고데모의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모르는 것을 솔직하게 고하고 주께 구해야 한다.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고 하신다. 물론 에녹과 엘리야는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으나, "그들이 직접" 올라간 것이 아니다. 옮겨졌으며(히11:5), 회오리 바람으로 올라간 것이다(왕하2:11). 오직 예수께서만 스스로의 힘으로 올라가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으뜸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골1:18)
 모세의 놋뱀 사건을 말씀하신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치료법으로 "파괴자가 파괴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으며, 뱀에 물린자들은 의심하든 어쩌든 보기만 하면 병에서 낫게 하셨다. 그 외 그들이 행한 것, 즉 그들의 공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의 구원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겸손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자세히 보면 니고데모가 한 모든 질문들을 그대로 말씀하신다.
ⓐ "우리가 아나이다"(니고데모, 2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예수님, 11절)
ⓑ 당신은 선생인 줄"(니고데모, 2절), "너는 선생으로서"(예수님, 10절)
ⓒ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니고데모, 2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예수님, 3절)
ⓓ "사람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니고데모, 4절), "사람이 ... 나지 아니하면"(예수님, 5절)
ⓔ "들어갔다가"(니고데모, 4절), "들어갈 수 없느니라"(예수님, 5절)
ⓕ "어찌... 있을 수 있나이까"(니고데모, 9절), "어떻게 믿겠느냐"(예수님, 12절)
ⓖ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니고데모, 9절),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예수님, 10절)
 보면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가 한 말 하나 하나를 꼼꼼히 다시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우리가 가진 의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성실하게 답변하신다. 또한 우리는 불신자를 대할 때 그들의 관심사로 접근할 수 있다. 얼마전 믿지 않는 친구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기독교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교리와 기독교 철학에 대해 관심이 있어, 쉐퍼의 책을 추천해주었다. 이후 바빠서 많은 얘기를 서로 나누지 못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기독교인이 자기가 믿는 것을 말하는 것에 대해 관용적이었고, 또 이를 알고 싶어했다. 갈망하는 듯 했다. 이 모든 것을 시작하신 이는 하나님일 것이다. 그것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참 미약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나를 들어 쓰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또한 복음 전도를 위해 내가 먼저 많은 준비가 되어있어야 겠구나 싶었다.


[3:22-36]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증언
 당시 이스라엘은 형식적인 문제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하기에 그들이 하는 것은 "정결예식"에 대한 "변론"일 뿐이다.(25절)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자들이 예수님께로 떠나 그를 따르는 자들은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오셨으니 나는 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는 낙담할 수도 있으나 그는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단의 권세를 무찌르시어 승리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최후 심판의 날이 오기까지 우리의 역할을 이땅에서 묵묵히 수행해야한다. 세례 요한의 자세를 본받겠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그리스도를 시기하도록 부추기는 말들을 한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시험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러한 시험에 견딜 수 있는 자는 인간의 영광이 아닌 주님의 영광을 구하고 바라는 자이다. 그리스도에 더 많이 전념할수록 나 자신에게 적게 마음을 쓸 것이다. 주님을 높이는 자에게 겸손은 뒤따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한다.(고전8:2) 그러나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안다고 해서 그것으로 득의양양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고전4:7;요3:27)
 세례 요한은 아직 '교회'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는 1:31에서도 드러나듯, 이스라엘 중심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29절과 같이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믿음의 표현이었다. 우리는 아직 온전히 알지 못한다할지라도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때에 더욱 큰 깨달음과 은혜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즉 그리스도에게 전념함으로써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다.
 이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도,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극히 적었다.(32,33절) 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땅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천상적이어서 그들이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내가 말씀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여 거듭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아는 것에, 믿음이 있는 것에 더욱 감사하게 되는 것이며, 말씀을 전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이해하고 따를 수 있도록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더욱 구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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