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 수가성 우물에서의 그리스도 1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자신을 시샘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떠나셨다. 이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영접하지 않는 곳은 떠나라고 말씀하시는데(눅9:5;눅10:10,11) 예수님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신다. 예수님께서는 증언을 받지 않는자들을 떠나신다. 물론 구원받을 자를 예정하신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책임을 분명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더욱 나에게 주어진 복음을 진실하게 받아들이도록 말씀 앞에 낮아져야겠다.
앞장에서 예수님의 증언과 인격이 이스라엘에게 거부되는 보았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4장에서는 이방인들이 돌이키는 것을 보게된다. 더 이상 구원은 이스라엘에 제한적으로 머물지 않고,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온 열방에 퍼지게 됨을 알린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셨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에게 어떤 영적인 능력이 발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자라 인치는 것이다. 물론 그 인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이를 기억해야 한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먼저 스스로 그리스도인인가를 돌이켜 봐야한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갈릴리로 갈 때 유대에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지간이었기에, 요단강을 건너고 베뢰아를 지나는 우회로를 택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만 하겠다는 것은 지리적인 요건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곳을 지나야만 하는 이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곳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고 회심시키기 위해 예정하셨기에 지나셔야만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여인보다 먼저 우물 곁에 계셨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삭개오도, 바울도 그러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나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구원을 생각할 때 항상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자.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만난 곳은 '수가'였고, 우물 곁이었다. 성경에서 장소의 특성은 거기에서 발생한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해결하는데 열쇠 구실을 할 때가 종종 있다. 본문에서도 그러하다. 여인의 영혼에 생명이 결핍되어있음을 예수님께서 폭로하셨다. '우물'은 예수님 자신의 상징이다. 여인은 그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수가'는 '구입했다'는 의미이다. 본문에서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 '야곱의 우물'이라고 강조한 이유가 있다. 이 지역은 야곱에 의해 구입되었고(창33:18,19), 그 후손들이 우물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구원은 예수님께서 지불하셨기 때문에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이 샘이 있는 땅의 일부는 후에 요셉이 칼과 활로 빼앗은 것이다.(창48:21,22) 우리의 구원도 성령께서 검(히4:12)으로 가져다주셨다. 결국 이 땅은 야곱이 샀고, 요셉이 칼과 활로 지켜 그에게 주어졌다. 요셉의 장자권의 일부가 되었다. 요셉은 장자가 아니었으나, 르우벤이 중한 죄에 빠졌기에 그에게 주어졌다.(대상5:1) 첫째 아담으로 모든 사람은 죄인이 되었으나,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첫째 아담이 죄로 인해 몰수당하고 상실한 유산을 받으셨다. 우리는 이를 기억하며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감사해야만 한다.
[4:7-10] 수가성 우물에서의 그리스도 2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먼저 물을 한모금 달라고 요청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토록 자신을 낮추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이로써 은혜의 역사가 시작된다. 물론 이 때 예수님은 피곤하고 목마르셨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 이유로 물을 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 이 세상은 예수님께 메마르고 목마른 땅이었다. 그 가운데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로부터 믿음과 감사를 돌려받는 것이 영혼의 양식이었다. 이를 기억해야 한다.
구원받는 자는 먼저 자신의 철저한 무능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도, 그리고 수가성 여인에게도 이것을 요구하시며, 이를 위해 대화를 진행하신다. 그러나 니고데모와 수가성 여인 모두 "어찌하여", "어떻게" 라고 대답한다.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반목하려한다. 이를 꺾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더군다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1:5,10절의 말씀이 너무도 와닿는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신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의 양심을 만지고, 지각을 밝혀주시고, 의지를 꺾으신다. 우리는 그때 극심한 영혼의 '갈증'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요청'해야 한다. 구해야 한다. 그러면 주실 것이다. 우리는 이를 위해 기도해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구하지 않는가? 이는 10절에서 말하듯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예수님 앞에서 니고데모와 수가성 여인 모두 동일한 조건에 있었다. 사회적, 도덕적으로 차이는 분명 존재하나 그것이 구원에 있어서 더 나은 시발점이 되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의 철저한 무능함을 깨달아야 한다.
교만함을 꺾고 주 앞에 겸손히 나가야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대로 "참된 것"을 구해야겠다. 약4:3절에서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경우를 말씀하시는데, 본문은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려준다. 겸손히 구하겠다. 그리고 구한 것을 받은 그 기쁨을 하나님께 바치겠다. 교회에서 봉사와 헌금을 하는 것은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며, 의무감에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받은 것을 갚을 길 없어, '부족하지만 이것이라도 드립니다'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이런 겸손함을 위해 더욱 기도하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와 여인에게 각자 상황에 맞추어 대하셨음을 본다. 우리는 전도할 때 지혜로워야 한다. 물론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접근 방식에 있어 우리는 지혜로워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우리는 기도로 준비해야한다. 나도 전도를 준비한다. 그들에게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끊임없이 기도로 준비해야겠다. 그러나 기도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전하겠다.
[4:11-19] 수가성 우물에서의 그리스도 3
여인은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떻게 당신(예수님)이 생수를 얻겠냐고 한다. 그녀는 '그'가 누구이신지 보지 못했기에, 이 세상적 조건에 얽매여 있었다. 이 세상에 지나치게 얽매일 때 우리는 주님을 온전히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친히 '생수'를 선물로 주신다. 그런데 본절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나듯 우물은 깊다. 즉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에게 생수를 제공하기 위해 먼저 고통의 무서운 깊이로 내려오신 것이다.
영혼의 목마름은 지상의 물로 채우기에 너무도 깊다. 영혼의 목마름은 오직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로만 해결할 수 있다. 그 선물은 충만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충만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믿음을 주신 자와의 교제를 유지시켜야 한다는 조건(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이 붙는다. 뿐만아니라 다시 그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로 창세 전에 작정하셨다면, 우리의 구원은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
15절의 말씀을 여인이 조금씩 변하는 것으로 보는 분들도 많으나,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물이 어딨어? 그런 물 있으면 어디 한번 줘보슈!'라는 외침으로 들린다.
예수님께서 다시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 말씀하신다. 그녀는 가서 남편을 부르고, 자신의 죄를 깨달으며, 그녀의 참된 성품으로 그리스도께 다시 와야만 했다. 또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신가를 여인에게 막대한 인내로 계시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여인에게는 남편이 없었고, 이를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다. 이런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보고서야 여인은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예수님께 고백하게 된다. 드디어 하나님의 음성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여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채기에 너무도 무지하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알아채지 못할 때가 숱하게 많다. 그러나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인내하시며 부르신다는 사실이 나를 감격시킨다.
[4:20-30] 수가성 우물에서의 그리스도 4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서 인지했으나, 그의 내면 깊이 들어가기를 여전히 꺼리기에 '예배할 곳'이라는 논쟁으로 회피하려 한다. 그녀는 '하나님의 선물'과 그녀에가 말한 자가 '누구신가'에 집중했어야 했다. 여인의 질문은 죄인이 논의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도 종종 이런 실수를 한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 그 분께 집중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가 당시의 예배를 떠올릴 때 성전, 랍비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앞의 2, 3장에서 도적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과 영적으로 무지한 니고데모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통념을 깨버리는 것을 또한 보게된다.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된 예배"가 중요하다.
예수님은 다시 그녀의 관심을 본질적인 것으로 이끄신다. 우리가 전도할 때, 그리고 우리 스스로의 신앙을 돌아볼때도 이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본질적인 것에 먼저 집중해야 한다.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육신에 속하는 외적 의식이 아닌 영적으로 예배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스스로 나타내신 계시에 적합한 방식으로 진리에 따라 충심으로 예배드려야 한다.
ⓐ 예배는 새로운 성품이 추구하는 행동이다.
ⓑ 예배는 구속된 사람의 행위이다.
ⓒ 예배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알려진 하나님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에서 본질적인 것에 집중해야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의식을 드리느나가 아니라, 누구에게 찬송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참된 예배, 영적인 예배는 단정하며, 조용하고, 경건하며, 예배자가 하나님께 전념하는 것이다. 그때 평안한 마음과 기뻐하는 영으로 가득찰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자신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셨다.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이 사실을 기쁨으로 전했다. 나는 복음서의 이러한 내용들을 볼때마다 찔린다. 참된 전도는 참된 마음의 변화에서 일어난다. 복음서에 등장한 많은 전도자들은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감격으로 스스로 우러나와 했다. 그런데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부끄러움으로 가득차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전도에 대해 강조할 때 그것을 우선적인 행위로서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성도의 당연한 귀결로서 강조해야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내가 그 참된 성도의 귀결로서 더욱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느낀다. 이를 위해 더욱 기도하며 노력해야겠다.
[4:31-42] 사마리아에서의 그리스도
제자들은 예수님께 음식을 드시라고 권하나, 예수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대답하신다. 제자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비록 훌륭한 성품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때때로 대단히 무지할 수 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기 전까지는 그러하다. 예수님의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뜻은 그가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들이 구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예수께서 온전히 이루신다. 본문의 주제는 '섬김'이다. 예수님은 참된 섬김에 대해 34절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정하신 일을 순전하고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전도에 대해서도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씨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를 각기 말씀하신다. 씨 뿌리는 자에게 보상이 약속되며, 거두는 자가 교만하지 않도록 근신하게 하신다. 이 말씀을 보며 깨닫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가 하나님을 믿게 된다면 너무도 좋은 일이겠지만, 그것이 무가치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이는 주일학교에서 수도없이 많이 들은 얘기이다. 그러나 실제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곧 깨닫게 되고, 그때 좌절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내가 순전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한다면 이를 주께서 아신다. 이 모든 일은 '섬김'으로 하는 것이다. 기쁨으로 해야하며, 충심으로 해야한다. 내가 그런 주님의 일꾼이 되기를 소망한다.
사마리아 여인이 복음을 증거하고,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시는데 연약한 사자들을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신다. 혼자서 감당하실 수 있으시나, 우리가 그 영광스러운 일에 참예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 놀라운 은총을 기억하며, 더욱 겸손하고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야겠다.
[4:43-54] 갈릴리에서의 그리스도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를 높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틀이 지나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셨다. 갈릴리는 예수님이 공생애 시기 이전에 오랜 시간 지내던 곳이다. 44절에서 "선지자각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을 하셨음에도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리로 가셨다. 그 이유는 마4:12-16절에 나오는대로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완전한 종으로 오셨고, 온전한 순종을 하셨다. 또 현재의 성공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일을 감당하기 위해 떨쳐내셨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 앞에 내 모습을 비추어보면 부끄럽기 그지 없다. 내 아버지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으로 사역을 하러 가셨다고. 그 결과가 세상적 관점으로 봤을 때, 고학력의 목회자가 부산의 작은 교회에서 시무하는 것은 성공이라기보다는 실패에 가깝다. 누구나 다 서울에서 사역을 하기 원하니까. 나도 아버지께서 서울의 큰 교회에서 사역을 하셨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인간적인 욕심일 뿐이다. 세상에서의 성공은 상급이 아니다. 그것에 얽매이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바라봐야겠다.
사마리아인들과 갈릴리인들이 달랐다. 사마리아인들은 아무런 기적이 행해지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으나,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을 보고서야 믿었다.(45절) 마치 도마가 그랬듯 말이다. 나도 이럴 때가 많다. 그러나 돌아볼 때 내가 기적을 바랄 때는 그 기적을 내 세상적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서만 생각했을 뿐이다. 하나님이 내 주인이시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그로인해 나에게도 그 영광이 덧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하나님의 이적이 존재하며, 나를 높이기 위해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다. 이를 기억하며 그분의 신실하심을 근거로 믿음을 견고히 해야겠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들었다. 이러한 고난은 그러나 그가 예수를 영접하는 복의 동인이 되었다. 우리는 고난 중에도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있으신다. 그 뜻은 하나님을 붙들기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붙들어야 한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 자신의 아들에게 가서 고쳐달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병자 곁에서 고치실 수 있으실 뿐 아니라, 멀리서도 고치실 수 있다. 이 점에서 백부장의 믿음과 우리는 비교하게 된다.(마8장) 물론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서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어느정도 있기에 예수님께 나아왔으나, 그 믿음이 온전하지 않았기에 완전히 문제를 내맡기지 못했다. 예수님은 이런 그의 중심을 아시기에,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는다고 질책하신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도 그러하다. 그 때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9:24)라고 부르짖어야한다. 그의 믿음은 부족하였고, 그의 간청도 온전하지 않았으나 예수님께서는 그 가운데 그의 진실함을 보시고 신하의 아들을 살렸다. 우리는 점차 바른 기도를 주께 올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온전하지 못함을 주께서 잘 아시며, 온전하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의 간청에 응답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한 것을 넘는 귀한 것을 주신다. 우리는 이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하기 위해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우리는 굳게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표적이나 확증을 주는 느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믿는 것이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곧장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일곱 시는 오후 1시경인데,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 34km 정도이므로 하루나 걸릴 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천천히 갈 수 있었다.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감정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예수님 그분이 얼마나 확실한 분이신지를 깨닫고 난 이후의 확신이다. 구원이 죄인에게 이르는 것도 그러하다. 우리는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확신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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