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5] 바데스다 못가의 그리스도
여기서 명절은 오순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오순절은 신16장 참고. 칠칠절/맥추절이라고도 부르며 보리 수확과 관련한 명절; 다른 본문에서는 '유월절'과같이 명절 이름을 명기한데 반해 본절에 명기하지 않은 이유는 아직 오순절 성령강림이 일어나기 전이라(행2:1) 그 의미가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오순절에는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이 율법에 명해진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다.(신16장) 예수님께서도 이 법을 존중하셨다. 바울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존중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자라 하더라도 상대의 권위를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양문(Sheep gate) 곁에 많은 병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시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베데스다 못가 근처에 있었다. 그곳에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하면, 먼저 들어가는 자가 병에 낫게 되기 때문이다.(4절) 이 모습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을 상기시킨다. 유대인 뿐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은 이토록 무력하다.
그리고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다. 38년은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후 광야에서 보낸 기간과 같다.(시2:14) 여기서 베데스다 못 물은 시내 산의 율법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천사들에 의해 전해졌다. 그것에는 생명이 있다. 율법을 살펴보면,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기에, 이를 온전히 지킴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내가 얼마나 무력한가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못의 물도 그러하다. 오랫동안 기다려도 단 한 명만 나을 수 있다. 그리고 진정 무력한 병자들은 그곳에 먼저 들어갈 힘이 없다. 마찬가지로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길을 예비하기를 원하셨으며, 38년 된 병자는 이 방편을 보여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갔을 때 그는 그가 누군지 알지도 못했다. 또한 구하지도 않았다. 또 그에게는 치유받아야 할 어떤 조건도 없었다. 그를 선택하신 이는 전적인 예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었고 은혜였다. 우리 모두는 죄 앞에서 무력하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다. 이는 그가 우리를 택하심으로 가능해진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배려받아야만 한다고 착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의 의지다. 용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내가 잘못해놓고선 상대가 용서해주지 않는다고 상대를 욕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하나님께 우리가 그런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를 향한 용서이며 배려이다. 그것으로 "왜 저 사람은 구원하지 않으셨나요?" 라고 어찌 비난할 수 있는가! 병자들이 예수님이 지나갈 때에 붙들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용서해달라고 빌고있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그럴 수 있는 의지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받은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달아야 한다. 깨달았다면 더욱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 감격을 늘 잊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쳐주셨다. 이는 명령으로 주어졌다. 고치신 분은 예수님이셨으나, 병자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야했다. 우리에게 이 반응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자랑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 걸어가자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간다고 꾸지람을 듣는다. 성도는 이렇게 때때로 비난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먼저 보며 때로는 감수해야 한다.
병자는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누가 고쳐주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예수님을 성전에서 다시 만나 치료하신 이가 예수님임을 이후에 깨닫는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은혜를 베푸시고 나서, 진리를 이용해 양심을 위해 지켜야할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을 '책임'이라고 했을 때 그것을 종교적 관습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내가 은혜받은 자로서의 마땅한 태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자가 자신을 고친 이가 예수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모습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이 이러해야한다고 믿는다. 그리스도로 인해 기뻐하고, 찬양하며, 고백하고, 전할 수 있어야 한다.
[5:16-30] 그리스도의 신성 (일곱 가지 증거)
다른 본문에 비해, 이 본문에서는 더더욱 책(아더 핑크)의 내용을 인용해 요약하는 것으로 보이겠다.
① 피조물을 돌보시는데 있어서의 동등성(16-18절) : 하나님께서는 6일동안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는 쉬셨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의 일로부터' 쉬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통치하시고, 섭리하시며, 피조물의 필요를 채우셨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피조물을 돌보기 위해 일하신다.
② 뜻에 있어서의 동등성(19절) : 30절에서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나의 뜻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하기 때문이다. 이 제한은 능력에 있어서의 결함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다. 참된 의미는 "나는 아버지와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며, 신적 완전성을 단언하시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와 의지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 된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유리되어 독자적으로 행동하신 적이 없었다. 그는 자기의 의지를 꺾어야 할 필요가 없었고, 그를 보내신 이의 듯에 완전하게 일치하셨다. 눅22:42절("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것은 예수님이 완전한 신인(神人)으로서 두 의지를 내재하고 계셨음을 의미하며, 그러나 이 둘이 혼동되지 않았기에 인간으로서의 의지(죽음과 고통에 대하여 움추리는 의지)대로 행하지 않으신 것이다.(존 라일 사복음서 강해 참고) 예수님은 인간으로서의 고난을 당하셨으나, 완전한 하나님으로서의 의지대로 행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만을 행할 수 있으며, 또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모두 함께 행하셨다.
나 자신에게 적용한다면, '아들이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말씀은 내 뜻대로만 행하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의 뜻으로는 아무 것도 행할 수 없으며, 내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처분에 맡겨져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자가 되어야겠다.
③ 지식에 있어서의 동등성(20절) : 본문의 의미는 이러하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무런 비밀이 없으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를 사랑하신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똑같이 무한한 완전성을 공통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그 사랑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일을 보여주심으로써 명백하게 밝혀진다." 그들 사이에는 강제나 억지가 전혀 없다. 그들의 상호 동등성 때문에 그들 사이에는 지극히 완전한 친밀성이 있다. 또한 유한한 것은 무하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와 똑같은 마음을 가지셨으며 그들은 지식에 있어서도 하나이고 절대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이 자명하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가 행하시는 모든 것"을 파악하고 이해하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④ 주권적 권리에 있어서의 동등성(21절) : 못가에서 한 병자를 치료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주권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 단순히 병 고치는 것 뿐 아니라, 20절의 "더 큰 일"(구원)도 주권적으로 행하신다.
⑤ 신적 영광에 있어서의 동등성(22-23절) :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심판을 다 맡기셨다.(22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⑥ 생명을 주시는데 있어서의 동등성(24-26절) :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신다. 죽은 자들도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살아나게 된다.(25절) 또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것(24절)은 영생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영생을 얻은 자의 모습, 즉 결과이다.
⑦ 심판관의 권능과 권위에 있어서의 동등성(27-30절) : 예수님께서 심판을 집행하시는 또 다른 이유로, 그가 인자로 오셨다는 사실이 제시된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무시당하고 거부당하며, 신적 영광이 부인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모욕당한 권리들의 정당함이 다시 입증될 것이다.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5:31-47] 그리스도의 신성 (세 가지 증언)
예수님은 아버지와 항상 함께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을 아버지와 독자적으로 증언하지 않으신다. 아들은 아버지와 독자적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아버지에게서 독립하여 스스로는 아무것도 증언할 수 없다.(참고 요8:13-16)
세례 요한은 와서 예수님을 증거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증언의 근거로 삼지 않으셨다. 그가 아버지와 동등하다는 것은 더 확고한 근거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을 통해 이를 상기시킨 것은, 그들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의 신성은 세례요한이라는 인간의 증언에 근거하지 않는다. 더 높은 차원에 근거를 두고 있다.
① 그의 역사들은 신성의 증거이다.(36절)
② 아버지께서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 아들에 대해 입증하신 증언이 증거이다.(37절)
③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39절)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해 하신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그를 "켜서 비추이는 등불"(35절)이라 하셨다. 나도 그를 본받아, 성도로서의 빛을 켜서 밝히고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적은 신성의 증거로서 제시되고 있다. 신비주의자들도 이적을 논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적은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먼저 많은 이적을 보이셨고, 사소한 것이 아닌 위대한 이적을 보이셨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행하셨으며, 긍휼과 자비로 (과시가 아닌) 행하셨다. 그 이적은 꾸밈없으며, 즉각적으로 효력이 행해졌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적을 기억하며, 신비주의자들의 그릇된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완고한 불신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애석해하셨다. 이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였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한다. 세상에서 영광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주님의 일을 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는가? 그들은 모세의 말, 즉 성경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모세의 말을 믿는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지성은 그토록 우리를 쉽게 속인다. 그들이 참되게 믿었다면, 그 성경에서 증거하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리 없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부패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39절) 그러나 그것은 믿음 위에 행해져야 한다. 우리의 믿음을 항상 점검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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