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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27일 목요일

요한복음 6장

[6:1-13] 오천 명을 먹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을 행하셨으나, 많은 이들이 그를 그리스도인 사실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에도 그러하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아름다운 본보기로만 여기고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행해진 때는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인들은 말씀의 참된 가르침은 잊고, 경건의 모양만 남아있었다. 유월절은 그저 '유대인의 명절'로서만 남아있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다시금 상기시켜준다.
 예수님은 큰 무리에게 어떻게 떡을 먹이겠느냐고 빌립에게 묻는다. 예수님은 빌립이 어떻게 대답하실지 아셨으나, 시험하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도 항상 시험은 닥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모두 주님께서 배치하신 것이다. 그 순간에 낙담하거나, 믿음을 져버리지 않고, 더욱 성장하고, 시험에서 이길 수 있도록 순종함으로 나아가길 소망한다.
 빌립은 예수님의 질문에 상식적인 답변을 한다. 빌립은 예수님과 동행하며 수많은 이적들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를바 있는가? 심지어 정말 감사해야 하는 순간에 우리는 은혜를 깨닫지 못할 때가 허다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빌립을 비난할 수 없다. 항상 스스로를 돌아봐야한다. 뿐만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빌립의 모습으로 인해 붙드신 것이 아니라, 그저 은혜로 붙잡고 계시다는 사실을 본문을 통해 더욱 뼈저리게 느낀다.
 안드레와 빌립은 믿음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앉게 하라고 하셨을 때 순종했다. 그리고 그 순종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더욱 뼈절게 깨닫게 되고, 주를 향한 믿음이 강화된다. 이것이 참된 복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믿음의 정도에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은혜의 풍족하심에 따라 부여된 것임을 본다. 그러므로 내가 누리는 현재의 복에 대해 내가 자랑할 것은 없으며, 더욱 은혜를 갈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떡을 나누실 때, 제자들에게 나누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떡이 불어난 것 자체는 사도들이 아닌, 예수님께서 하셨다는 사실이다. 제자들은 신실하게 예수님께서 시키신 것을 행했을 뿐이다.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다. 그러나 그 일을 하도록 감당하는 것, 떡을 나누어 주는 일은 우리에게 맡기신 역할이며, 특권이며, 의무이다. 우리의 역할을 행하지 않는다고 주님의 뜻이 성취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를 행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배불리 먹도록, 충만하게 나누어주신다. 그러나 낭비하지 않으신다. 나은 조각을 모조리 거두신 것을 통해 이를 볼 수 있다. 주께서 우리에게 많은 좋은 것을 주셨다. 우리는 이를 또한 낭비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시간도 주를 위해 귀중히 써야한다.


[6:14-27] 바다 위를 걸으신 그리스도
 앞서 이적을 보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했다. 14절에서 "그 선지자"로 인식한 것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식했음을 알려준다.(신18:15;요1:21) 그러나 그들은 그 메시야 앞에 죄인으로서 엎드리며 경배하는 대신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서, 왕으로 삼으려 한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다. 예수님은 물론 왕으로서, 선지자로서 오셨으나, 제사장의 임무를 먼저 감당하셔야했다. 예수께서 수행원 없이 혼자 산으로 가신 것을 통해 그가 제사장직을 감당하셔야 한다는 것이 부각된다.(레16:17) 또한 예수님은 이미 왕이시다. 왕으로 삼아질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저 그분 앞에 경배해야 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배를타고 가버나움으로 떠나는 중 큰 파도를 만났다. 그들은 앞서 이적을 봤음에도 영적으로 우둔하여져서 바다를 건너오시는 예수님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계속 노를 저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섭리 안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항상 잊는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주님의 도우심을 깨닫도록 이러한 고난을 때로 허용하신다. 그리고 물론 주님께서 우리를 그 고난에서 건지신다. 이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니 두려워하지 말 것을 다시금 가르치신다.(20절) 그리고 그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릴때에 우리는 제자들처럼 노를 저어야 한다. 물론 순간순간 우리의 믿음이 약하여져서 온전히 의지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때도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무지와 연약함을 바라볼 수 있도록 주께서 도우실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고난에 직면할 때에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알게 하시며, 그 순간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전념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


[6:28-40]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
 사람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행위를 가르치시지 않고 믿음을 강조하신다. 물론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변화되는데 행위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근본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믿음안에서 하나님의 도우심, 은총을 입어야한다, 나의 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부패함을 보며 온전히 주님만을 의지하고 경배해야 한다. 그러자 사람들은 주님을 믿을 근거, 표적을 구한다. 즉 그들은 주님을 진실로 믿고 있지 않았다. 이미 주께서 행하신 이적을 그들은 기억하지 않고 다시금 이적만 구한다. 감사하기보다는 모세보다 더 나은 이적을 우리에게 선보이라고 말한다. 그런 모욕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볼 수 있도록 가르치신다.(32절) 우리의 버릇없는 모습에도 우리가 성장할 수 있도록 가르치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어떤 일을 보여주는 대신 자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신다.(그 신령한 복에 대해 먼저 말씀하시고, 그것이 자신임을 점진적으로 가르치신다. 그러한 예수님의 인도에 사람들은 신령한 떡을 찾게된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이다. 그는 하늘에서 오신 분이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며, 구약의 만나는 그를 예표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임을, 구약의 모든 이적은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임을 분명히 밝히신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대로 그가 행하신것보다, 그가 누구신지에 대해 살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인도해주셨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를 원하게 된것을 보며 다시금 내게 자랑할 것이 없으며 온전히 주께 감사해야함을 깨닫는다.


[6:41-59]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신 그리스도
 앞 구절은 야외에서 갈릴리인들과 예수님께서 나눈 대화이며, 본 문단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나눈 대화로 추정된다. 그리고 비슷한 주제를 다루기에 병기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그의 선언에 대해 수군거렸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그들에게 수군거리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는다면 아무도 자신에게 올 수 없음을 말씀하신다.(44절) 이 말씀은 인간의 부패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판단을 믿을 수 없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우리 밖에 있음을 알리시는 말씀이다. 우리는 교만하지 말아야 하며, 무력함을 인정하고, 주께 도움을 청해야만 한다. 이에 대해 아더 핑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말씀이 확실히 사실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간적 책임을 알려 주시기 위하여 그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내쫓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겸손하게 하시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것은 그들의 면전에서 문을 닫아버리는 말씀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만 그 문으로 들어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희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의도로 보다는 어디에 희망이 있는지를 가르쳐 주려는 말씀이다. ... (중략) ... 아버지께서 나를 '이끄시지' 아니하여 내가 그리스도에게 갈 수 없다면 그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버지께 나를 "이끌어주시도록" 간청하는 것이다.
 이끄심은 죄인의 독선을 꺾으시고 자기의 잃어버린 바 된 상태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다. 이로써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
 이어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46절)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무한한 차이를 드러내시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동시에 우리가 아버지께 직접적인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다는 오해를 제거해버리셨다. 그런 신적 영광이 충만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자기 살을 내주시기 위함이다.(51절) 이 땅에 죽기 위해 오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떡으로, 양분삼아 살 수 있다. 그 사실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미하며, 예배를 드려야만 한다.
 그 말씀에 유대인들은 서로 다투었다.(52절)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드릴 수 없었다. 그때 예수님께 그 의미를 다시 묻지 않고 자기들끼리 다투었다. 우리도 말씀을 읽다가 우리의 상식으로 받아드리기 어려운 부분들을 가끔 마주하게 된다. 그 때 그것을 기도로 주님께 물으며 나아가야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나의 지성만을 의지하여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끙끙 싸맬 것인가? 나 자신을 항상 돌아보며 더욱 겸손히 주를 의지해야겠다.
 그때 우리는 주님과 밀접한 교제를 누릴 수 있다.(56절) 예수님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셨다.(57절) 이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의지하여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를(예수님)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이제 신자도 매일 겸손하게 그리스도께 의지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6:60-71]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
 예수님은 유대에서와 마찬가지로 갈릴리에서도 환영받지 못하셨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역사도 늘 반복된다.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렵다고 불평한다.(60절) 우리의 부족한 지성으로 충만한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신자는 알기를 갈급하기에 불평하지 않으며,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한다. 또한 위선자들은 수군댄다.(61절) 이 말씀을 나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는 시금석으로 삼아야겠다.
 우리 영혼을 살리는 것은 영이다. 육은 무익하다.(63절) 어떤 종교적인 행위, 분위기에 따라 우리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성은 한없이 완악하기에 이는 불가능하다.(65절) 이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더욱 성령의 도우심들 갈급해야하며, 이를 위해 더욱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가감없이 전해야한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에 파묻혀버린 말씀이 아닌, 온전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것이 쉽지 않고, 많은 자들이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말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또한 내가 변화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때문임을 기억하며 항상 감사하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이들이 떠난다. 그러자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에게도 떠나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온데, 누구에게로 가겠느냐 답하며, 예수님께서 거룩한 자이심을 믿고 알았다고 고백한다. 세상이 성도들을 손가락질하면, 외면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때도 우리는 주님을 의지해야한다. 또한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함을 다시금 확인한다. 주님을 더욱 알기를 원하기에, 더욱 믿음이 굳건하여지기를 소망해야겠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임을 아셨으나 사도로 삼으셨다. 누구보다 예수님과 가까이 동행했으나 주를 배신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다.(마27:4) 하나님의 은총이 모두에게 주어졌으나 죄인이 이를 거절하는 것을 알게된다. 이러한 일이 없도록 나 자신을 돌아보도록 경고한다. 또한 주위의 위선자들의 꾐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를 의자하고, 붙들며, 동행해야한다. 우리의 본성을 의지하지 말고 늘 경계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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