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2:1-11] 베다니에서 그리스도께 향유를 부음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다. 이전에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분주하게 일을 했고, 이에 대해 꾸중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마르다는 다시 열심히 "일을" 했다.(2절)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했고, 그 가운데 일을 했다. 음식/잔치 준비는 마르다에게 주어진 큰 은사였다. 자신이 가진 은사를 그리스도를 위해 바치는 것은 너무도 아름답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우리를 평가하는 요소가 아님을 깨닫는다. "나는 진정 예수를 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었다.(2절)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인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게 되는지를 명백히 보여주는 구절이다.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았다.(3절) 향유의 가격은 노동자의 일년 임금정도였다.(5절;마20:2) 이렇게 귀한 것을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바쳤다. 나사로가 부활한 직후도 아닌 이 시점에서, 마리아의 행동은 결코 충동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없다. 마리아는 심사숙고했고, 예수님은 이렇게 귀한 것으로 영광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녀의 예배는 향기로웠다.
가룟 유다는 이것으로 마리아를 비난한다.(4-5절) 그러나 그는 돈궤를 훔쳐간 자이며(6절), 은 30냥에 예수님을 판 자이다. 그는 "가난한 자"를 핑계로 돈에 대한 아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NASB를 보면 1절에서 예수님이 베다니로 간 것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와 함께 표현된다. 이는 앞 장에서 예수를 죽이려는 가야바의 음모에 대응하는 구절이다. 즉 예수님은 여기서 가룟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며, 자신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마리아가 향유를 바칠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7절) 부패한 마음을 따라 행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진행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우리는 위로를 얻는다.
이웃을 사랑하며 그들을 돕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예수님은 작은자에게 한 것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도 말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을 소홀히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는 곧 죽으시고 승천하실 것이기에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8절)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이 땅에서의 삶이 그리 길지 않음을 자각하고, 더욱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스스로를 촉구해야 할 것이다.
[요 12:12-19]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산나(지금 구하소서)"를 외쳤다. 그들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으라 외쳤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 성경을 이루기 위해 행해졌다.
①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창49:10-11) : "규"는 종족의 권세를 상징하는 지팡이다. 본문에서 유다 지파로부터 중보자가 나와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 예언되어있다. 나귀가 매이는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이며(사5), 암나귀 새끼가 매이는 포도나무는 그리스도이시다(요15:1).
②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것이요"(단9:25) : 이레는 7일을 의미하며, 7년을 상징한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의해 예루살렘이 회복된 후 예수님이 오기까지 69이레, 483년이 걸릴 것을 예언했다.
③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 나귀를 타고 오실 것을 예언했다. 멍에를 메지 않은 짐승만이 희생제물로 쓰일 수 있었기에(민19:2;신21:3),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다(15절).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에게 버림받으셨다. "기뻐"함을 받게 되는 것은 재림 때 성취될 것이다. 공의의 심판은 재림 때 이루어질 것이며, 초림때는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자비로 오셨다. 그러므로 15절에서는 이는 생략하고 본문을 인용했다.("겸손하셔서"도 생략했는데,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큰 의도였기에 생략한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계셨으나, 그 전에 그의 존엄한 인격이 드러나야 했다. 이스라엘이 십자가에 못박는 자가 누구신지를 명백히 드러내어, 그들의 죄가 더욱 변명할 여지가 없음을 확고히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오셨다. 이방인들은 병마를 의지했으나(신17:16;시20:7), 예수님은 율법에 순종하는 분으로서, 종의 신분으로서, 낮은 자로서 오셨다. 그 나귀조차 빌린 것이었다. 나는 무엇을 의지하는가?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 세상의 것들에 의존하고, 모든 것을 방어하려하지는 않는가? 참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한다고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단호히 "네"라고 답할 수 없는 내가, 이 연약한 믿음이 부끄럽다.
[요 12:20-36]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찾음
예수님은 다윗의 아들로서, 메시야로서 오셨다. 그리고 자신을 믿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이는 앞의 육적인 관계가 아닌, 영적인 관계로 맺어진다.
이전 본문에서는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바리새인의 모습이, 이후에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려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 사이에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이방인의 모습이 나타난다.(20-21절)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자로 오셨기 때문이다.
이는 죽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의 죽음으로 사탄은 권세를 잃을 것이며(31절), 그는 영광받으실 것이다.(23절) 그의 영광은 죽음으로 이루어지기에 "영광을 얻을 때"라고 말씀하신다.(일차적으로는 이방인에게 영광을 받으신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둘째 아담으로 오셨다. 죄로 가득한 다른 인간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그러니 이 둘 사이에 자연적인 연합은 이루어질 수 없다. 죄 많은 인간과 죄 없으신 하나님은 함께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죽으셨다. 그의 죽음으로 열매를 맺어(24절), 성도를 이끄신다.(32절)
예수님은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셨다. 세상의 빛이며, 생명인 예수님조차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죄로 가득찬 우리의 생명을 아끼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지금 내 육신은 죄로인해 하나님과 유리되어있는데, 진리앞에서 이 썩어질 몸을 아끼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25절) 이를 인정하나 내 몸은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진리도 진리이지만, 먼저 내 몸 건사해야하지 않겠는가'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킨다. 그러니 나는 기도한다. "하나님. 저는 이토록 믿음 없는 자입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바도, 응답하시는 바도 잘 듣지 못하는 자입니다.(29절) 그러면서 다윗, 히스기야, 요시야와 같은 의인들이 때로 하나님의 응답을 잘 듣지 못할 때, 조롱하기 좋아하는 자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제 의를 자랑하기 좋아하는 자입니다. 이런 제게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저를 직접 인도하지 않으신다면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32절)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겨주셔서 바른 길로 인도해주시는 것이 제 유일한 소망이오니(26절),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따를만한 믿음을 제게 주옵소서. 세상의 허망한 것을 보지 않고, 오직 영원한 상급을 보게하옵소서."
[요 12:37-50] 그리스도의 공생애에 대한 회고적 개괄
우리의 불신을 살펴봐야한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셨으나 많은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고(37절),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이사야의 예언(사53장)이 성취되었다. 하나님께서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권능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시면 결코 우리는 믿지 않는다.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단념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믿을 수 없게 되었다.(4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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