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장은 13장의 속편이다. 각 장에는 우리 대제사장의 사역들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각 장에서 나타나 있는 그의 봉사는 서로 다르다. 하지만 이 두 장은 공히 높은 데에 계시는 우리 대언자를 완전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말하자면 13장에서 우리 대언자께서는 한 손을 그의 성도들의 더러운 발 위에 얹으셨고, 여기에서는 다른 한 손을 아버지의 보좌 위에 얹으시고 놀라우신 솜씨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이어 주는 고리를 만들고 계신다. 13장에서 그는 허리를 동여매시고 우리의 발을 향해 몸을 굽히셨다. 17장에서는 눈을 들어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고 계신다(17:1). 하나님의 깨끗하신 보좌와 우리의 더러운 발 사이에 놓여 있는 전적인 거리감을 완전히 없애시는 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청하시는 것이 거절될 리 있겠는가? 모든 것은 틀림없이 허락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분께서 청하시는 것을 항상 들어주신다. 이와 같이 우리 대언자의 기도는 완전하게 받아들여진다. (Mr. T. G. Bellet, 아더핑크 요한복음 강해 p.943)
17:1-5 :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
17:6-19 : 제자들을 위한 기도
17:20-26 :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
[요 17:1-5]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1
예수님은 아버지께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영화롭게 해주시기를 간청한다(5절). 예수님은 중보자로서 이를 아버지께 간청하고 있다. 예수님과 달리 나는 스스로의 의를 드러내려하지 않는지 돌아보게 된다.
에수님은 이 간청을 하는 근거를 제시한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수단이 아님을 보이신다.
먼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다(1절). 나는 과연 세상에서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잊고있지 않은지 돌아본다. 이것은 한편으로 택함 받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구하신 것만이 아니라, 영화롭게 하셨다(4절).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일을 이루심으로 성취되었다. 최근 기독교인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지 못했기에 많은 비난을 받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의 거룩한 삶, 그리고 이를 위해 애쓰는 모습에서 나옴을 기억하겠다.
때가 되었기 때문에 영화롭게 해주시기를 간청했다(1절). 기도할 때 항상 아버지의 때를 기다렸는지 돌아본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영광으로 승천하시어, 성령을 보내주셨다. 성령을 통해, 그를 보내신 아버지와 아들을 알게되어 영생을 얻는다. 즉,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으로 영생을 얻는다(3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고,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 더욱 간구하겠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신 주님을(1절) 본받아, 공경과 신뢰의 자세로 기도하겠다.
[요 17:6-12]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2
이 구절은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지만 그 중에 세가지만 써보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데, 그들을 매우 칭찬하신다(7절). 사실 돌아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끌려가셨을 때 세 번이나 부인했고, 제자들은 모두 두려워 흩어졌다. 그들은 그토록 연약했음에도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살피고 칭찬해주셨다. 사실 돌아보면 우리의 믿음은 항상 약하다. 주님을 져버릴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예수님은 칭찬해주신다. 이는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된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근거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로 말이암아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이다(10절). 앞서 1절에서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1절).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거룩하지 못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기도를 하셨다. 이는 어마어마한 은총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다른 측면에 집중하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을 위해 하셨고, 그에 순종하시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도 아버지와 아들의 뜻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 자꾸만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이 끼게 된다. 그러나 내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임을 기억하며 나의 의를 죽여야 한다.
또한 예수님은 세상에 더 계시지 않기에,개인적인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11절). 예수님은 이토록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분이시다. 이를 깨달을 때마다 위로와 은혜가 충만하다.
[요 17:13-19]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3
앞서의 내용을 뒷받침하여, 제자들을 위한 청원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이 누리는 기쁨을 충만히 갖도록 하셨다 (13절). 예수님은 세상 안에 계셨으나 세상에 속해있지는 않으셨다. 그런 예수님께서 누리는 기쁨은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기쁨이었다. 그 기쁨을 우리에게 전해주신다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충만한 은총을 누리고 그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중재자 역할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시다.아버지와 사귐이 있을 때 우리에게는 기쁨이 있다.
이 기쁨을 누린다는 것은 우리도 역시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됨을 의미한다 (14, 16절).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내게 됨을 의미한다 (18절). 그런 우리는 세상의 미움을 살 수도 있다 (14절). 그러나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미움받을 때 우리는 점검해야 한다.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인 것인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충만히 갖고 있지 않기에 당하는 것인지. 만약 전자라면 우리는 그것을 버텨야 한다.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보전하심을 기억하자 (15절).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해야함을 기억하자. 기도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을 보고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요 17:20-26]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4
예수님은 제자들 뿐 아니라, 믿는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특별히 나는 22절의 말씀에 집중하게 된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여기서의 영광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영광은 아니다. 그것은 성육신하신 자로서 얻으신 영광, 세상에서 이루신 일에 대한 영광을 가리킨다.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다. 물론 이는 미래에 받을 영광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을 믿어야 하며, 그 은혜에 감격해야 한다. 동시에 나는 그 영광을 입은 자로서의 자세에 집중하게 된다. 하나님과 연합한 자에 걸맞도록 거룩해야 함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인이라 말하지만, 거룩하지 않은 많은 이들을 본다. 우리의 행동이 아버지와 예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해야한다. 이를 위해 간구해야한다. 나는 얼마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아버지께 구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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